<김승현의 文化데이트>“무대는 인생의 거울인데… 요즘 TV 너무 장난만 쳐”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정하종기자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이 34년 만에 연극무대로 복원, 6월5일부터 21일까지 개관축하작품 ‘맹진사댁 경사’를 공연한다.

명동예술극장은 일제때 명치좌(明治座)로 시작, 시공관, 국립극장, 국립극장 분관 예술극장으로 이어지면서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보금자리였다. 연극을 비롯해 오페라, 무용, 여성국극, 클래식 연주회 등 모든 장르가 무대에 올랐던 대한민국 ‘문화1번지’였다. 유치진과 이해랑 등 한국 연극의 기초를 세운 극작가 겸 연출가를 비롯해 변기종, 김동원, 장민호, 강계식, 백성희, 김진규, 박노식, 최무룡, 허장강, 도금봉, 문정숙, 최은희, 황정순, 이낙훈, 김동훈, 박정자, 김금지 등 당대의 스타들이 이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가수 현인이 ‘신라의 달밤’을 처음 불렀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으며 윤복희씨가 7살짜리 꼬마가수로 데뷔한 곳도 여기였다.

‘맹진사댁 경사’의 주인공 맹진사 역은 유치진의 제자 신구(73·사진)씨가 맡았다. 지난 24일 오후 1시 서울 중구 충무아트홀 스튜디오B에서 연습을 2시간 앞두고 만나 명동예술극장에 대한 추억과 배우 인생에 대해 들었다.

무대와 TV드라마, 영화에서 그의 카리스마는 남다르다. 어디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허름한 티셔츠에 점퍼 차림에 베이스볼캡형 골프모자를 쓴 채 대본을 들고 터덜터덜 나타난 그의 모습은 전혀 의외였다. 그저 사람 좋은 동네 할아버지였다.

“내가 스타도 아니고, 뭐 그렇지요. 지하철 타고 다니면 아무도 몰라봐요. 그냥 보통 할아버지지요.”

그는 1950년 경기중(당시는 6년제)에 입학, 1956년 졸업했다. 한국타이어 조양래 회장, 대림산업 이준용 회장, 전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 등이 그의 고교 동기다. 그는 서울대 상대에 떨어지고 성균관대 국문과에 입학했다가 군대에 갔다온 뒤 학업을 접었다.

“철없는 생각이었지요. 학교가 도대체 맘에 와닿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소일할 바에야, 군대부터 먼저 때우고 다시 고민해 보자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제대후 역시 길을 찾지 못했다. 그는 아나운서를 염두에 두고 당시 명동 태극당 옆에 있는 시청각교육원을 다녔다. 그때 우연히 유치진씨가 운영하는 드라마센터에서 배우지망생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아나운서가 지금은 오락프로에도 출연하고 그렇지만 그때는 원고를 읽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배우가 좀 더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할 것도 같았습니다. 또 유치진씨가 사회적으로 신뢰할 수도 있는 분이어서 방향을 틀었지요.”

학업을 포기하고 배우의 길을 나서게 된 데 대한 뭔가 좀 절실했던 배경이 있었을 것 같았는데 의외로 간단했다. 판사, 검사, 공무원, 은행원 등 직업 선택이 극히 제한돼 있던 그 시절 실용적인 차원에서 선택한 기능교육(?) 과정에서 우연히 곁길로 빠져든 결과라는 것이다. 질문마다 한참을 생각해 단문으로 느릿하게 똑똑 끊어 답하는 등 지극히 이성적으로 보이는 그에게는 좀 어울리지 않는 감정적 선택으로 보인다.

“지나치게 이성적이면 이 일을 못해요. 감정이 지배합니다. 머리로 계산해서 한다면 풍성한 표현이 어렵지요. 지금 생각해도 그때 방향을 튼 게 잘한 것 같습니다.”

1960년 드라마센터 1기 동창이 이호재, 전무송, 민지환씨 등 아직도 왕성하게 활약하는 명배우들이다. 한국 현대연극의 거목 유치진에게 무엇을 배웠을까 궁금했다.

“정석입니다. 무대위에서 허튼짓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무대는 우리네 인생의 거울이다. 사람을, 인생을 표현하는 데 생명있는 관객들이 보고 있다. 장난기 있는 어떤 짓거리도 용납할 수 없다’고 서릿발처럼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요즘 속칭 ‘애드리브’ ‘개인기’를 위주로 하는 토크쇼가 TV를 점령하고 있다.

“고쳐야죠. 친구들 모여 장난하는 게 안방에 그대로 나오는 것은 문제입니다. 애드리브가 그 프로를 좋은 쪽으로 띄워주는 그런 것이면 모르겠는데 자기 장기를 장난기처럼 보여주는 것은 고쳐야 합니다. 시청률을 내세워 부화뇌동하는 것도 더욱 문제입니다.”

그는 “그렇다고 도덕시간 같은 프로만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며 “정리되고 걸러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귀한 우리 후손들이 보고 배우고, 나이 든 사람들도 젊어질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순화되고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감동의 드라마가 필요합니다. 꼭 도덕군자의 살아가는 모습만이 아니라 다양한 감동의 모습을 그릴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본명은 ‘신순기’다. 유치진 선생이 ‘오랠 구(久)’ 외자로 지어줬다. 배우로서의 생명이 오래 가라는 뜻과 함께 ‘새 신’에 ‘옛 구’로 읽혀 과거와 현재에 두루 통하는 배우라는 앞을 내다본 작명으로 이해된다.

“해석은 고마운데, 나도 그 뜻을 잘 모르겠어요. 본명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배우의 이름으로는 좀 ‘촌스러워’ 유치진 선생께 지어달라고 했는데 어느 날 부르시더니 ‘신구로 해라’였습니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고,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아 지금까지 쓰고 있는데 저도 궁금합니다.”

그의 배우인생에는 청춘이 없다. 시작할 때부터 아버지, 할아버지였다. 청춘, 사랑의 주인공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예쁜’얼굴이 아니라 그래요. 어느 정도 갖춰야 ‘불륜’의 주인공도 하는 것 아니겠어요. 악역은 많이 해봤습니다.”

하지만 그가 맡은 역은 아무리 작아도 빛이 난다. 날카로운 지성과 후덕함, 구수한 넉살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윤택씨가 연출한 연극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역은 다시 보기 어려운 명연이었다. CF에서 “니들이 게맛을 알아”라고 외친 장면은 ‘게’를 다른 말로 바꿔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된 명CF다.

연극과 영화, TV연기가 어떻게 다를까 궁금했다.

“영화나 TV는 NG(No Good·좋지 않은 장면 또는 실수)가 나면 다시 찍고, 편집하면 됩니다. 그러나 연극은 일단 막이 오르면 배우가 모두 책임져야 합니다. 달아나 숨을 데가 없습니다. 살아숨쉬는 관객들과 교감하며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나 영화나 TV는 다릅니다. 카메라가 끌어당기고 밀어주고, 마이크가 앞에 와있으니 샤우트(shout·크게 말하기)나 과장해서 움직임을 보여줄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영화나 TV가 감독과 프로듀서, 기술의 예술이라면 연극은 배우의 예술, 사람의 예술로 휘발해 없어지는 것”이라고 연극론을 밝혔다.

“연극을 비디오나 DVD로 저장해서 보면 맛이 없습니다. 연극은 기록할 수 없지요. 공연이 끝나면 휘발해 사라져버리고 텅 빈 공허함이 남습니다. 그 빈 것을 채우기 위해 다음 작품을 찾습니다. 해도 해도 채워지지 않는 그 공복감이 연극의 마력인 것 같습니다.”

신구씨의 춤은 인간문화재급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에 그는 얼굴이 밝아지며 “탈춤을 잘 췄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제가 1968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 간 것도 배우가 아니라 춤꾼으로 갔어요. 당시 김진옥씨와 서울대 이두현 교수 등이 복원에 애를 썼습니다. 이때 황해도 탈춤을 김진옥씨로부터 배워 공연을 하면서 제가 첫 번째 먹중을 했지요. 아마 연극으로 빛을 못봤으면 인간문화재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때 함께 하던 친구가 인간문화재가 됐지요.”

그는 “배우에게 춤은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꼭 현대무용일 필요는 없습니다. 흔히 배우에게 목소리로 표현하는 대사만 강조하는 경우가 많은데 움직임이 살아있어야 소리도 좋아집니다. 또 연출자나 감독이 원하는 표현을 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필요에 맞게 걷고 뛰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초·중등 과정에 연극 무대 현장 교육을 꼭 첨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연극무대에서 제대로 사용하는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표준어를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거기에 어울리는 자연스럽고 표현력 풍부한 품위있는 몸짓도 배워야 합니다. 다들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우리 아름다운 말을 살려야 합니다. 연극은 우리말을 가장 아름답게 보존하는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편집국 부국장 hyeon@munhwa.com

■ 신구는…

▲1936년 서울 출생 ▲1956년 경기고 졸업 ▲성균관대 국문과 중퇴 ▲1962년 연극 ‘소’로 데뷔 ▲1972년 KBS ‘허생전’으로 탤런트 데뷔 ▲화동연우회 회장 ▲수상=동아연극상 남자연기상(1966, 1969, 1971), 한국연극영화TV예술상 연기상(1976, 1980, 1981),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최우수연기상(1999), SBS 연기대상 연기상(2002)·공로상(2007), KBS 연예대상 공로상(2005), KBS 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2006), MBC 방송연예대상 공로상(2007) ▲대표작=‘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하멸태자’ ‘태’ ‘맹진사댁 경사’ ‘열개의 인디언 인형’ ‘불가불가’ ‘에쿠우스’ ‘눈꽃’ ‘민중의 적’ ‘파우스트’ ‘눈물의 여왕’ ‘느낌 극락같은’ ‘봄날’ ‘떼도적’(이상 연극) ‘동심초’ ‘세종대왕’ ‘배반의 장미’ ‘왕도’ ‘학교’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그 여자 사람잡네’ ‘아내’ ‘미안하다 사랑한다’ ‘토지’ ‘쩐의 전쟁’(이상 드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