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재의 스포츠&피플>“가슴 쓰릴때 많아… 골프 29세까지만 하라고 했어요”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사진=곽성호기자

‘골프 대디(golf daddy)’란 단어는 미국 프로골프계, 특히 미여자프로골프협회(LPGA)에서는 일반 명사화됐다. 한국 여자 프로골프 선수들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코치, 캐디, 운전기사 역할을 동시에 하는 ‘아빠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국에서의 ‘골프 대디’는 모든 것을 팽개치고 자식 꽁무니만 쫓아다닌다는 ‘극성 부모’라는 비아냥도 섞여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LPGA투어 내에서도 ‘한국 아빠 따라 하기’가 늘고 있다. 실제로 폴라 크리머와 모건 프레셀 등 젊은 선수들은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매달리고 있다. 개인종목인 골프는 훈련부터 교습, 대회출전, 이동, 숙식, 스폰서십 체결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만큼 매니저의 역할이 다양하고 막중하다. 한국선수들은 그 역할을 대부분 아버지가 한다. 한국 여자 골프선수의 성공 이면에는 이른바 ‘골프대디’의 헌신이 있었던 것.

이번 주초(13일) 미 여자프로골프 투어 ‘메이저 중 메이저대회’로 꼽히는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지은희(23·필라코리아)의 뒤에도 아주 특별한 ‘아빠’가 있었다. 그는 11년전 초등학교 6학년인 딸에게 골프 클럽을 쥐여줬다. 그때가 마침 박세리가 US여자오픈에서 맨발의 투혼을 보이며 우승해 ‘국민영웅’이 됐을 때였다. 그리고 11년 후 그의 딸도 US여자오픈에서 대회 마지막 날 18번홀에서 6m짜리 버디 퍼트를 성공시키며 극적인 역전 우승으로 ‘메이저 퀸’이 됐다. 그래서 그 또한 ‘메이저 대디’가 됐다. 지은희와 아버지 지영기(54)씨 얘기다.

지씨는 여느 ‘골프 대디’와 달랐다. 그냥 딸의 편의를 위해 운전기사를 하고, 일정을 관리하는 단순한 ‘매니저’가 아니었다. 그는 수상스키 국가대표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20년간 수상스키 감독으로 선수들을 지도해 온 그의 경험이 딸에게도 그대로 적용됐다.

15일 오후 지씨가 운영하는 가평의 골프연습장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골프연습장까지 가는 도로에는 10여개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가평의 딸 지은희 US오픈 제패’‘장하다 지은희 US오픈 우승’등의 현수막은 지은희의 출신교인 가평고(옛 가평종고) 앞길에는 더욱 빼곡하게 걸렸다. 한 슈퍼마켓에서 지씨의 골프 연습장 위치를 묻자 “국회의원 선거때보다 더 많은 현수막이 붙었다”고 덧붙인다.

지씨는 기자의 방문에 연방 “고맙다”고 했다. 그가 기자에게 ‘고맙다’고 한 것은 딸을 괴롭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은희가 큰 일을 해냈기에 인터뷰도 하고, 그간 도와주고 지켜 봐 주셨던 분들을 위해 환영 행사에도 참석해야겠지만 그간 힘든 일정을 소화해 온 것을 지켜 본 아빠로서는 며칠 간만이라도 자유롭게 지내고 휴식을 취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라며 자신이 딸을 대신하겠다고 한다. 지은희에게는 누구보다 무서운(?) 감독 선생님에서 ‘아버지’로 돌아 온 그였다.

지씨는 경기 때마다 직접 캐디백을 메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은희가 지난해 웨그먼스대회에서 LPGA투어 첫 우승을 차지했을 때 “모든 것은 아빠가 있어 가능했다. 아빠는 나의 영원한 스승이다”고 말했던 것 처럼 지씨는 지은희에게는 엄격한 스승이자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다. 소극적인 성격의 딸이 심리적으로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잡아주는 지씨의 역할은, 지금의 지은희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는 딸의 캐디를 하다 너무 안타까워 딸과 싸울 뻔한 얘기를 털어놓았다. “2007년 하이트컵 챔피언십에서 파만 해도 우승이 가능했던 파5홀인 마지막 18번홀에서 더블보기를 범해 역전우승을 허용했어요. 은희에게 3번 우드로 티샷하라고 했는데 말을 듣지 않고 드라이버를 잡았다가 볼을 페어웨이 우측 러프로 보낸 뒤 5온 2퍼트로 더블보기를 범했어요. TV로 생중계되는 걸 알고 있었기에 티박스에서 딸과 다툴 수도 없고….”

그는 스포츠 지도자로서 경기장에서 선수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안다. “지난해 웨그먼스에서 우승한 이후 은희가 성적이 나지 않아 위축됐을때 더 기다리라고 했죠. 빨리 가기 위해서는 오히려 오래 기다려야 하고, 기회가 왔다 싶으면 절대 놓치지 마라고 말했죠. 이번에도 10번 홀에서 실수를 했을 때는 더 기다려야 하는가보다 싶었는데, 은희가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성공했습니다. 정말 대견합니다.”그는 지은희가 우승한 직후 통화에서 ‘은희’라고 무르지 않고 “우리 챔피언 수고했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의 독특한 훈련방법 또한 화제가 됐었다. 수상스키 감독 출신답게 아이언샷의 정확성을 키우기 위해 한강에서 배를 타고 이동하면서 지은희에게 배 위에 정확히 볼을 올리도록 특별훈련을 시켰다는 얘기는 골프계에서 공공연하게 전해오는 일화다.

어떻게 그런 훈련을 생각하게 됐냐고 물었다. “그 얘기는 좀 부풀려진 면이 있어요. 물론 스트로폼에 거리를 적어 놓고 한강을 향해 볼을 치도록 한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은희의 아이언 샷의 정확도를 높이는 훈련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물에 뜨는 공을 구해 강을 향해 샷을 하게 한 것은 연습장이 없었기때문에 생각해 낸 훈련 방법이죠. 오히려 기술적인 것보다는 골프에 더욱 재미를 붙이게 하기 위해 생각해 낸 것이죠.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라면 뭘 못하겠어요. 그런 차원의 얘기입니다.”

지씨는 “은희가 두세 살 때 몸이 약해 경기(驚氣)를 자주 일으켜 건강하게 키우려고 여러 운동을 시켰다. 다섯살때 수상스키를 겁없이 타기도 했다.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으로 골프채를 잡았다”고 옛날 일을 회상했다.

수상스키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해외전지훈련을 다니다 골프에 입문하게 됐다는 지씨는 핸디캡 5의 싱글 골퍼. 지씨는 1998년 초등학교 6학년이던 딸과 춘천의 한 골프연습장을 찾았다가 딸을 골프 선수로 입문시켰다고 한다.

“가평에 골프연습장이 없던 시절이었어요. 골프 치는 사람도 가평에 6명뿐이었죠. 그때 춘천의 연습장에서 지금 국가대표 감독인 한현희 코치를 만났는데 은희를 보고는 ‘야무지고 담력이 있다. 대성할 소질이 보인다’며 ‘골프선수로 키워라’고 말하더군요. 그 말을 들은 은희도 ‘한번 해 보고 싶다’고 해 본격적인 훈련을 시키게 됐죠.”

수상스키 국가 대표팀 감독을 지낸 아버지와 핸드볼 선수 출신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아서인지 지은희의 운동신경은 남달랐다. 지은희는 골프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전국 대회 2위에 올랐다. 덜컥 골프 클럽을 쥐여줬지만 골프 불모지 경기 가평의 환경은 열악했다. 딸의 레슨을 위해 하루는 서울로, 하루는 춘천으로 왕복 4시간 거리를 출퇴근했다. 안 되겠다 싶어 1999년에는 은행 대출을 받아 아예 가평에 골프연습장을 차렸다.

그는 스포츠 지도자 출신답게 체력과 심리의 중요성을 깨닫고 틈나는 대로 딸을 체육과학연구원에 데리고 가 체계적인 훈련을 받게 했다. 아마추어 시절 한국여자아마선수권을 비롯해 주요 대회를 휩쓴 지은희가 2005년 프로 데뷔 후 우승 문턱에서 번번이 무너져 지씨의 가슴은 새까맣게 탔다. 국내에선 준우승을 7번이나 했고 우승은 2번에 그쳤다. 2007년 지씨는 20년 가까이 몸담은 수상스키 대표팀에서 물러났다. 다른 ‘골프 대디’들처럼 딸에게 ‘올인’하기 위해서였다. 지씨는 2007년 딸이 LPGA투어에 진출한 뒤에는 코치, 매니저, 운전기사 등 1인 다역을 맡았다.

지씨는 특히 소극적인 성격을 가진 딸의 중심을 잡아주며 심리적인 부분에서 많은 도움을 줬다. 지은희는 “골프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심리적으로 밀리지 않는 것이 경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아버지로부터 배웠다. 예전에는 위기 상황이나 결정적 순간에 너무 긴장해 떨거나 경기를 망치는 일이 많았으나 이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며 우승의 공로를 아버지에게 돌렸다.

지씨는 수상 스키 선수들보다 더 엄하게 지은희를 지도했다고 한다. “큰 불만 없이 따라와 줘 고마울 뿐이죠. 얼마 전 경기를 마치고 온 딸에게 ‘빈 스윙 100개만 하고 자라’고 했더니 은희가 ‘아빠, 내 몸은 무쇠가 아닌데…’라며 빤히 절 쳐다보더라고요. 그땐 마음이 좀 쓰렸어요. 그래서 골프도 29세까지만 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30대부터는 또 새로운 인생에 도전해 보라고….”

지씨는 딸을 위해 빚을 내 골프연습장까지 차렸다. 골프연습장 앞에 우승 축하 화환도 그득하다. 그는 “허구한 날 적자더니 이젠 은희 덕분에 장사가 좀 됩니다”라며 웃는다. 그리고 그도 ‘지은희’만큼 가평의 유명인사가 됐다.

체육부장 kj59@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