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가정의 추석나기>6년차 필리핀댁 “이젠 차례상 척척… 명절 겁 안나요”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인천 남구 숭의동에 사는 김재니퍼(왼쪽 두번째)씨가 모처럼 남편(맨 오른쪽), 두 자녀, 시부모, 시누이 등과 함께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저녁 한때를 보내고 있다. 인천=곽성호기자

곱상하고 한국어가 유창한 필리핀 출신 며느리 김재니퍼(30)씨는 추석이 다가오면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시어머니, 시누이 등과 함께 시장에 가서 제수용품을 일일이 사다가 떡, 만두, 전, 생선, 나물 등 각종 차례 음식을 만들고 끝없이 밀려오는 손님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재니퍼씨는 시댁이 4대 9명으로 구성된 대가족인데다 남편이 장손이어서 명절이면 30명분 이상의 음식을 장만해야 한다. 그렇지만 재니퍼씨는 명절이 겁나지 않는다. 우선 낯설고 물선 한국으로 시집온 지난 2004년 7월 이후 남편, 두 자녀, 시조모, 시부모, 시누이, 시동생 등과 한집에 어울려 살면서 한국주부의 ‘기본기’를 철저히 익혔기 때문이다.

그는 시댁 식구들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기 위해 수년간 시어머니에게 사사하고 남모르게 노력한 결과 지금은 찌개, 김치, 나물 등 웬만한 반찬은 다 만든다. 특히 그가 만든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는 입이 짧은 시아버지로부터도 만점을 받았다.

재니퍼씨가 명절을 두려워하지 않는 두번째 이유는 낙천적인 성격이어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데다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진해서 막내 시동생의 속옷까지 기꺼이 빨아주는가 하면 식구들의 귀가 시간 차이 등으로 하루에 밥상을 8, 9번씩 차리더라도 싫은 내색을 안한다. 매년 5차례씩 돌아오는 제사도 무난히 잘 치른다.

재니퍼씨는 “아들(3)과 딸(5)의 육아, 시부모 봉양, 가족들 식사 준비, 청소 등 가사일을 도맡아 하느라 힘든 면도 있지만 하루 하루가 재미있다”며 “부모님을 포함한 가족들이 잘 대해줘서 힘이 난다”고 말했다.

실제로 재니퍼씨가 이처럼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한 데는 가족들의 따뜻한 배려와 개방적인 태도가 큰 역할을 해왔다. 남편 김종훈(42)씨와 시부모는 재니퍼씨에게 가사일을 맡겼지만 절대 며느리를 아침 일찍 깨워 아침밥을 하라고 하지는 않는다. 필리핀에서는 가족 구성원이 각자 알아서 아침밥을 챙겨먹고 출근하는 관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남편은 재니퍼씨가 외로움을 덜 느끼도록 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부부동반으로 10여명의 다문화가족으로 이루어진 모임에 정기적으로 나가고 있다. 남편은 또 결혼 후 세 차례나 장인을 한국으로 초대했으며 아내를 한 차례 필리핀에 다녀오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재니퍼씨가 시댁의 생활에 잘 적응한 데는 종교적인 인연도 어느 정도 작용한 듯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가톨릭 신자이며 시댁 식구들도 재니퍼씨가 며느리로 들어오기 1년 전부터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시아버지 김성규(67)씨는 “전에는 집안 분위기가 침울했었는데 며느리가 들어오고 난 후 집안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며 “요즘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외국인 며느리를 적극 들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시어머니 박길례(66)씨도 “다른 자녀들이 외국인 배우자와 결혼한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는다”며 “이제는 우리나라도 다문화 국가가 된 만큼 외국인 며느리 등에 대해 더 이상 색안경을 끼고 보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재니퍼씨가 남편을 포함한 가족들과 서로 이해하고 융화하기까지에는 숱한 우여곡절과 진통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남편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외국인인 까닭에 부친이 결혼을 심하게 반대했던 일, 식구 4명뿐인 단란한 가정에서 지내다 대가족으로 시집와서 가사일에 적응하느라 애먹었던 일, 한옥과 추운 겨울 날씨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일, 동네에서 주위 사람들의 눈총을 받았던 일 등.

남편 김씨는 “엘리베이터 수리로 바빠서 며칠 집에 못들어 갔더니 내가 두집 살림을 차린 것으로 아내가 오해하더라”며 “함께 살다보면 문화적인 차이로 빚어지는 소소한 오해와 갈등이 한두가지가 아니다”고 말했다.

재니퍼씨는 앞으로 두자녀를 외국으로 유학 보내는 대신 친정집에 보내 영어도 배우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친해지도록 할 계획이다.

두 자녀가 국제적인 감각을 익히는 동시에 양쪽 집안의 유대를 돈독히 하는 역할을 하도록 기회를 주겠다는 생각이다.

한국에 처음 시집와서 온돌에 적응이 안돼 좁은 방안에 침대를 들여놓고 생활했지만 지금은 온돌이 더 편하고 음식 중에는 감자탕과 삼겹살이 가장 맛있다는 재니퍼씨. 그는 이번 추석을 전후해 인천에 사는 필리핀 친구들을 만나 그동안 밀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것과 틈틈이 호스피스 같은 대외 봉사 활동을 통해서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게 꿈이다.

재니퍼씨와 김씨는 지난 2004년 4월 만났다. 당시 노총각이던 김씨가 친지의 소개로 필리핀 마카티 지역으로 가서 현지 백화점에 근무하는 재니퍼씨를 만나며 사랑에 빠져 곧바로 결혼했다. 김씨와 현지에서 결혼식을 올린 재니퍼씨는 그해 7월부터 한국생활을 시작했다.

인천 = 이상원기자 ysw@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