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가정의 추석나기>“얼굴 한번 못본 조상에 차례·성묘 처음엔 이해 안됐죠”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온 장유보위(뒷줄 가운데)씨가 추석을 앞두고 집마당 텃밭에서 남편, 시어머니, 아들 형제와 함께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종갓집이어서 추석명절엔 육체적으로 힘들기도 하지만 친척들이 모두 모여 함께 떠들고 웃으며 음식을 만드는 등 애틋한 정을 나눌 수 있어 정말 즐겁습니다.”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온 뒤 종갓집 장남과 결혼해 정착한 장유보위(37·충북 청주시 상당구 사천동)씨는 요즘 차례 음식 마련에 여념이 없다. 장씨는 시어머니 최이석(68)씨와 함께 인근 북부시장에서 수시로 장을 보고 전을 부치는 등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갈 정도로 바쁘지만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고 늘 웃는 표정이다.

결혼 7년차인 그녀는 한동안 제사와 명절때 구경이나 하면서 심부름하는 수준에 머물렀으나 3년 전부터는 음식 장만을 주도하는 등 종갓집 맏며느리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특히 명절때면 20여명의 친척들로 집안이 발디딜 틈도 없지만 그녀는 어색한 억양으로 친척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등 분위기 메이커로서의 역할도 톡톡히하고 있다. 장씨는 이번 추석에 차례를 지낸 뒤 가족, 친지들과 함께 자동차로 20여분 거리인 증평군 송산리에 있는 시댁 종산으로 성묘를 갈 예정이다.

장씨는 “명절때마다 친척들이 모여 보지도 못한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는 것이 처음에는 신기했는데 이제는 조상을 공경하고 모시는 풍습도 이해가 되고 오히려 본받을 만한 규범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우즈베키스탄의 작은 도시인 자르쿠르간에서 태어난 고려인 3세인 그녀는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 살 당시 한국어 통역사로 근무할 정도로 억양만 약간 어색할 뿐 우리말을 잘 한다. 장씨는 2002년 돈을 벌기 위해 입국, 경기 동두천시의 한 재봉공장에 취업했다. 이때 그녀의 성실하고 쾌활한 모습을 눈여겨본 지인의 소개로 기계제작 회사에 다니는 지원근(42)씨를 만나 1년간의 연애 끝에 2003년 5월 결혼했다. 그녀는 현재 시어머니와 남편, 유통회사에 다니는 시동생 성근(37)씨, 아들 명환(10) 용환(6)군 형제 등과 함께 20평의 작은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다. 시아버지는 2005년 암으로 돌아가시고 시동생 영근(40)씨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며 시누이 성자(34)씨는 출가했다.

그녀는 “시어머니는 집안의 중심으로, 남편은 기둥으로 역할을 잘해 주고 있어 든든하다”며 “특히 나이가 같은 시동생과는 친구처럼 지내는데다 재롱을 부리는 두 아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을 느낀다”고 집안 자랑을 했다. 물론 그녀도 명절이면 러시아에 사는 친정 식구들이 그립다. 그러나 가족들이 오순도순 재미있게 사는 이곳이 이제 자신에게 ‘사랑이 퐁퐁 샘솟는 더없이 큰집’이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2006년 한국 국적을 취득해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그녀는 올 1월부터는 청주지역 초등학교, 유치원, 어린이집, 아동센터 등에서 러시아를 소개하는 다문화강사를 맡아 그녀의 성격만큼이나 재미있고 신바람나는 강의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원근씨는 “명절때마다 종부로서 고생하는 아내를 보면 미안하고 고맙고 안쓰럽기도 하다”며 “워낙 애교가 많고 표정이 밝은데다 열심히 생활하기 때문에 보기만해도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닭살 부부애’를 과시했다.

청주 =글·사진 고광일기자 kik@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