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 이병철 탄생 100주년 - 그가 한국경제에 던지는 교훈>“국가관 없으면 사업가 아니다”… 한평생 ‘애국기업’ 외길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호암(오른쪽)이 1960년대말 제일모직 대구공장을 찾아 생산 라인을 점검하고 있다. 삼성그룹 제공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951년 대구에서 조선양조주식회사를 경영하던 시절의 호암.

오는 12일은 호암(湖巖)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 회장이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20세기 최고의 별 중 하나로 평가되는 호암은 뛰어난 사업성과 도전정신으로 오늘날 글로벌 우량 기업으로 우뚝 선 삼성그룹을 있게 한 주인공이다. 그러나 그가 대한민국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것은 이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기업을 경영하는 데 앞서 항상 조국을 먼저 생각한 애국자였다.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대한민국의 기업가정신이 위축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상황에서 호암 정신은 한국 경제에 많은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호암 탄생 100주년을 맞아 호암의 인생과 철학, 한국 경제에 던지는 교훈 등을 2회에 걸쳐 되새겨본다.

“어이, 조센진. 조센진이 무슨 돈이 있어 1등 선실을 기웃거려? 건방진 조센진!”

1927년 여름 17세의 한 청년은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일본 유학을 앞두고 부산발 일본 시모노세키(下關)행 배로 대한해협을 건너던 중 일본인 형사가 배멀미를 견디다 못해 1등실로 방을 옮기려던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 회장을 막아선 것이다. 일본인 형사는 호암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매우 불쾌한 말투로 ‘가난한 조센진’이 1등실을 타는 이유와 청년 이병철의 신분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호암은 “조센진 돈 필요없으니 어서 꺼져라”는 제지를 받고 결국 2등실로 돌아갔다.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던 호암은 비로소 나라가 망했다는 말의 의미를 처음으로 절감했다. 그리고 자신이 부자라고 하더라도 일본에 무시받지 않으려면 나라가 독립하고 강해져야 한다, 나라가 강해지려면 우선 경제적으로 풍족해져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됐다. 자존심 강하고 집요했던 그는 훗날 사업가로서 일본과 경쟁을 할 때마다 이날의 뼈아픈 모욕을 떠올리며 전의를 다지곤 했다.

호암의 일생 중 가장 상징적 4자성어인 ‘사업보국(事業報國)’, 즉 ‘기업경영을 통해 국가에 충성한다’는 꿈은 이렇게 출발했다. 실제 그의 인생은 사업보국의 연속이었다. 창업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삼성이 걸어온 길은 한국 산업사의 구조전환 과정 그 자체였다. 호암은 1938년 삼성상회를 열고 양조업에서 막대한 현금을 창출했지만, 수 년 뒤 미련없이 정리했다.

“사업이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초심을 지키려면 양조업은 한계가 명백했다. 결국 호암은 1948년 수입의존도가 큰 대한민국의 현실을 한탄하며 무역업에 뛰어들게 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기업이 삼성물산이다. 이후 1950년대 들어 6·25전쟁 이후 더 비참해진 국민들의 생활상을 목격한 호암은 제조업이 국가 경제를 회생시키고 치솟는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절감하고, 국민들의 ‘식(食)·의(衣)’와 연관된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잇달아 세웠다. 어린 시절 비료가 부족해 농사를 짓지 못했던 사람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목격했던 호암은 1960년대엔 국내에 일본을 능가하는 세계 최대 비료 공장을 짓겠다며 유럽 및 미국 정부와 직접 차관 교섭에 나섰다. 결국 1967년 한국비료라는 대기업을 세워 국가에 헌납하기도 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걸쳐 호암은 “대한민국 산업은 전자와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탈바꿈해야 한다”면서 삼성전자,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 등을 창립했다. 1970년대 말엔 일본의 움직임을 눈여겨본 호암은 세간의 반대를 무릅쓰고 첨단산업에 진출하기로 한다. 바로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는 벌써 70대. 1976년 위암 수술을 받아 건강이 예전 같지 않은 상황이었다. 멈출 줄 모르는 기업가정신이 또다시 빛나는 순간이었다. 국내외에선 “선진국들이나 하는 반도체 사업에 후진국인 한국의 삼성이 뛰어드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라는 비판 여론을 쏟아냈다. 그러나 호암은 자신이 있었다. “난 신사업을 추진할 때 명확한 기준을 갖고 있다. 첫째는 국가적 필요성이 무엇인가, 둘째는 국민의 이해가 어떻게 되는가, 셋째는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이 기준에 따라, 호암은 당시 국가적 과제는 ‘산업의 쌀’이며 21세기를 개척할 산업혁신의 핵인 반도체 산업을 키우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호암의 사업보국 실천이 항상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6·25전쟁, 4·19의거, 5·16, 12·12사태 등 정치적인 격변 속에서 권력은 언제나 호암 같은 기업인들을 핍박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호암은 이 같은 역경을 묵묵히 받아들였고, 결국 이겨냈다. 호암 이병철 회장이 탄생한 지 100년이 되는 올해 호암은 “돈을 벌겠다는 사람, 국가관과 사회관이 없는 사람은 기업인이 아니다”는 말을 일평생 몸으로 실천한 선각자로 평가받고 있다. 호암은 1976년 ‘나의 경영론’이라는 글을 통해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행히 나는 기업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왔고, 나의 갈 길이 사업보국에 있다는 신념에 흔들림이 없다”고 말했다.

김만용기자 my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