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의 설날>설 대목장 열리면 콩닥콩닥… 종일 쏘다녀도 피곤한 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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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칠십을 넘어서게 되면,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일에 자신도 모르게 초연해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감성적인 젊은이들처럼 사소한 충격이나 변화에도 깜짝깜짝 놀란다든지 환호성을 지르는 일들은 그늘 속으로 들어온 그림자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 뱀이 벗어던지고 떠난 허물처럼 세월의 축적이 남긴 음울한 보상인 셈이다. 옆에서 벼락이 떨어진다 해도 원래 그러려니 하는 무감각이 살 속으로 스며든 탓이다. 충격적인 불행이나 불길함을 예고하는 일이 생긴다 해도 팔자려니 해서 일찌감치 단념하거나 무덤덤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안달하거나 조급증을 낼 일도 없어진다. 그러나 두 가지 일만 닥치게 되면 나는 지금도 가슴이 울렁거리고 흥분되는 것을 감출 수 없다.

그 중 하나는 시골 여행길에서 전통시장이 열리는 골목길로 들어설 때이고, 다른 하나는 설날이 며칠 안으로 다가올 때다. 나와 같은 산골 아이가 소년시절 동안 가장 기다렸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설 대목장이었다. 연중 주기적으로 열리는 오일장 중에서 가장 눈부신 장날은 아무래도 추석보다 설날을 앞둔 대목장일 것이다. 나는 어릴 때, 설날 자체보다 그 대목장을 가슴 설레며 기다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난에서 벗어날 징조를 찾을 수 없었던 어머니는 내게 설빔을 마련해줄 능력이 없었다. 징징거리고 있는 내 손목을 잡아끌고 떡 방앗간으로 가서 떡가래를 빼는 일 따위는 아예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겨우 고명도 없는 멀건 떡국 한 그릇으로 만족해야 했고, 이웃집에서 설날 아침에 건네주었던 차례음식에서 강정이나 가래떡 맛을 볼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서 나는 설날에 추석 때와는 달리 어째서 가래떡을 뽑아 먹어야 하는 것인지 그 까닭조차 알지 못했다.

색깔이 없는 긴 가래떡은 신성하고 깨끗함을 상징하며 장수를 기원한다는 조상들의 격조 높은 음식 문화를 담고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었다. 설령 어머니가 번듯한 설빔을 해 입힌다 하더라도 세배를 받아줄 친척들도 별로 없었으므로 내게는 세배 순례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관심은 오직 설 대목을 노리고 열리는 장날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설 대목장은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에 열린다. 그러나 그 겨울 바람 속에는 신선한 육체적 쾌감을 안기는 마약이 스며 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장거리를 헤매고 쏘다녀도 피곤한 줄 몰랐고, 막연한 기대감으로 가슴은 계속 뛰었다. 여우 목도리를 한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설빔을 졸라대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일찍부터 악다구니와 욕설과 멱살잡이가 거칠게 오가는 장거리를 섭렵하는 조숙한 아이로 자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