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아래 첫 이랑 드넓은 초록 바다 땀으로 일군 풍경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드넓게 펼쳐진 안반데기의 고랭지 배추밭. 배추밭 사이의 길에 올라선 사람의 크기를 보면 비로소 이 배추밭의 광활한 규모가 짐작이 간다. 사진 속에 담긴 배추밭은 안반데기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지금으로부터 40∼50년 전. 어디 꼭 그곳만 그랬을까 싶지만, 강원도 백두대간의 험준한 산자락에 헐벗고 버려진 땅이 있었습니다. 화전(火田)과 벌목의 상처로 뻘건 흙과 바위 투성이로 남은 땅. 겨울이면 매서운 추위가 수은주를 영하 30도 아래까지 떨어뜨리고, 다른 계절에도 한번 불었다 하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황소바람이 능선을 타고 넘는 곳. 칼바람과 추위에 맞서야 하는 최악의 환경. 그곳이 바로 강릉 고루포기산 자락의 안반데기, 그리고 옛 영동고속도로가 지나는 평창의 대관령휴게소 구간입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이들 두 곳 중에서 한 곳은 지금 산자락 가득 펼쳐진 광활한 고랭지 배추밭이 됐고, 나머지 한 곳은 우람한 전나무와 잣나무, 독일가문비나무와 낙엽송이 울창한 숲이 됐습니다. 그 땅을 변모시킨 것은 다름 아닌 가늠할 수조차 없는 ‘인간의 수고’입니다. 이 두 곳은 풍광 자체만으로도 매혹적입니다. 그러나 그곳이 가진 게 단지 풍경의 아름다움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곳에 바쳐진 고된 노동이 더 묵직한 감동으로 오랫동안 마음에 남습니다.

먼저 찾아간 곳은 비탈진 능선을 따라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고루포기산 자락의 해발 1100m 안반데기입니다. ‘안반’이란 떡메를 내려칠 때 받치는 판을 말하고, ‘데기’란 둔덕을 뜻하는 ‘덕’의 강원도 사투리입니다. 안반덕의 고랭지 배추밭 앞에 서면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구름이 넘나드는 능선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 배추밭 이랑을 보면 곡괭이과 삽만으로 산자락의 밭을 개간했을, 한 세대 전 사람들의 굳은살 박인 손이 먼저 떠오릅니다.

옛 영동고속도로가 지나는 대관령휴게소 부근의 특수조림지 역시 마음의 눈으로 봐야 하는 곳입니다. 그 면적만 무려 618만㎡(187만여평)에 달하는 울창한 숲. 이 중 사람의 손으로 가꾼 인공림이 311만㎡(94만800여평)입니다. 이곳은 30여년 전만 해도 화전민 집단 이주 후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산림 지대였습니다. 겨울철 최저기온 영하 32도, 평균 강설량 187㎝, 순간 최대 풍속 초당 45m. 한마디로 나무가 자라기에 ‘최악의 환경’을 가진 곳입니다. 이곳에 전나무와 잣나무, 독일가문비나무 84만3000여그루가 심어졌습니다. 심어진 나무는 거센 바람에 뿌리째 뽑혀 버리고, 추위에 얼어 죽었습니다. 간혹 살아남은 몇 그루 나무들도 죄다 바닥을 기면서 겨우 숨만 이어 갈 뿐이었습니다. 여기에 나무를 살려 내기 위한 ‘가공할 만한 노동’이 바쳐집니다. 각 나무마다 일일이 방풍책과 보호통발, 지주목이 설치됐습니다. 그리고 34년. 지금 조림지는 우람한 나무들이 빼곡히 깊은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힘차게 둥치를 뻗어 올린 거목들이 하늘을 가려 대낮에도 어둑어둑할 정도입니다.

이들 두 곳은 모두 평창과 강릉의 경계쯤에 위치해 있어 한데 묶어 다녀오기 좋습니다. 더구나 안반데기는 튼실한 배추들이 수확을 기다리고 있는 바로 지금이 가장 빼어난 풍광을 보여 줄 때고, 대관령의 특수조림지도 아름드리 나무들 사이로 용담이며, 꽃향유, 벌개미취 같은 여름과 가을꽃들이 피어나는 이즈음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강릉·평창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