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천연섬유로 만든 개량한복을 입은 정지환 할아버지가 지난 6일 강원 춘천시 남산면 창촌3리 ‘녹색농가박물관’사랑채에서 새끼줄을 이용해 새집을 만들고 있다. 자신의 집을 내놓아 지난해 6월 박물관을 만든 정 할아버지는 현재 박물관 관장을 맡고 있다. 춘천 = 김동훈기자 dhk@munhwa.com
“이 새집이 조그마해도 하루 종일 해야 겨우 두 개 만들어.”
지난 6일 오전 강원 춘천시 남산면 창촌3리 마을 초입에 있는 ‘녹색농가박물관’. 천연염색으로 만든 황토색 개량 한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한 어르신이 대문과 연결된 10㎡ 남짓한 사랑채 방에서 새끼줄로 열심히 새집을 만들고 있었다. 안채와 사랑채, 별채, 외양간과 창고, 마당 등 180㎡에 이르는 이 박물관의 관장인 정지환(89) 할아버지가 주인공이다.
3분의 2 정도 완성된 새집은 ‘와’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터져나올 정도로 정교한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정 할아버지는 손님이 찾아오자 자리를 털고 나와 농기구와 농촌생활 용품들을 일일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문 쪽을 보니 벽에 ‘녹색농가박물관 농경생활 유물 현황’이라는 제목에,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95점의 이름이 일련 번호 순으로 쓰인 액자가 걸려 있었다.
안방과 건넌방 2개, 부엌과 아궁이가 있는 안채에는 정 할아버지가 수십년 동안 손때를 묻혀가며 사용한 주옥같은 ‘작품’들이 진열돼 있었다. “이 ‘불켜는 등잔’은 우리 아버지가 쓰던 것을 내놓은 거야. 60년 이상은 됐지.” 정 할아버지가 등잔에 불을 붙이자 심지가 발갛게 타올랐다. “저 망태는 지금으로 치면 배낭이지. 밭에 일하러 갈 때 저기에 밥을 넣어 갖고 다녔어.”
정 할아버지는 물건들을 설명하면서 수십년 전 추억이 되살아나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6·25가 나고 몇 년 있다가 이 집을 지었어. 그때 산에서 밤나무와 소나무를 잘라 말려 놓았다가 지게로 지고 산을 넘어오는데 숨이 턱턱 막히더라고.”
정 할아버지는 안채 맞은편에 있는 별채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벽에 걸려 있던 우장(雨裝)을 꺼내 써보며 “이게 비올 때 쓰는 건데 비가 와도 밭에서 일하는 데 끄떡없지”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었다.
정 할아버지는 이어 소가 밭을 갈 때 풀을 뜯어먹지 못하도록 입에 씌우는 부리망, 코뚜레, 닭이 알을 품을 때 사용하는 알둥지, 병아리를 키울 때 쓰는 병아리둥지 등을 일일이 설명했다. 박물관 뒷마당으로 가자 경사진 곳에 정 할아버지가 정성들여 키우는 양봉이 10여개 놓여 있었다. 정 할아버지는 “저게 그동안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는데 올해는 병충해가 많아서 반이나 망가졌어”라며 혀를 끌끌 찼다.
정 할아버지는 평범한 농군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뛰어났다. 집에서 쓰는 물건은 모두 직접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수십년간 그의 손을 거쳐간 물건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정 할아버지는 소중한 물건들이 방치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차에 춘천시 농업기술센터에서 농가박물관을 만들어보자는 제의를 하자 흔쾌히 승낙했다.
지난해 6월1일 개관한 이 박물관 바로 옆에는 정 할아버지가 마을 이장인 아들 정용대(65)씨와 부인 이순례(85)씨와 함께 살고 있는 개량 한옥집과 그가 정성들여 키우는 채소들이 있는 텃밭이 있었다. 이곳이 농가 형태의 박물관으로는 전국적으로 유일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지난해 서울 상계동의 초등학생 50여명이 1박2일로 단체 관람한 데 이어 올해는 제주도에서 수십명이 찾아왔다. 주말에는 입소문을 듣고 자가용을 몰고 온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박물관을 구경하고 돌아간다.
1시간 여 동안 집안 곳곳을 다니며 설명을 하던 정 할아버지는 부녀회에서 점심으로 준비한 막국수를 먹으러 마을회관으로 갔다. 가는 길에도 정 할아버지는 박물관 입구에 서 있는 20년 이상된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가리키며 자신이 심은 것이라고 자랑했다. 순간 끼어들어 오래 사는 비결을 물어봤다. “특별한 게 없어. 자고 일어나면 식전에 대접으로 냉수 한 그릇을 마시지. 한 40년 이상 됐어. 그게 비결인지도 모르지.”
정 할아버지는 “뭐든지 잘먹어. 식성이 좋아”라고 했다. 오전 내내 새집 만드느라 시장했는지 정 할아버지는 막국수 한 그릇을 먹고도 모자라다며 반 그릇을 더 들었다. 반주로 나온 소주 두 잔도 달게 마셨다. 식사를 마친 정 할아버지는 오후엔 새집 하나를 더 만들어야 한다며 박물관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후손을 위해 우리의 것을 하나라도 더 남기겠다는 장인정신이 그를 오래 살게 하는 것 같았다.
춘천 = 김충남기자 utopian21@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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