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세상보기>여배우 ‘至美’에 매혹된 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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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배우, 그리고 김지미 / 김종원 등 지음/한국영상자료원

“모처럼 귀국해서 공개석상에 나서면서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는 심보는 도대체 뭐야.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살았던 배우로서 언론을 통해 팬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가 아니냐 말야.”

원로 배우 김지미씨에 대해 최근 이런 유의 불만을 터트리는 언론사 기자들이 많습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고 있는 김씨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을 위해 지난 7월 귀국해서 머무르고 있습니다. 지난 20일 오후엔 경기 남양주 종합촬영소에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영예를 누렸지요. 그는 귀국 이후 공식 행사에 나타나면서도 언론과의 개별 접촉은 극히 꺼리고 있습니다. 문화일보 기자들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를 만나 인터뷰를 했으나 그 과정에서 무척 애를 먹었습니다.

김씨는 막상 인터뷰를 허락한 후에는‘여장부’라는 별명에 걸맞게 시원시원하게 모든 말을 쏟아냈습니다. 그런 그가 사전엔 왜 그렇게 언론과의 인터뷰를 기피하는 것일까. 한국영상자료원이 펴낸 책 ‘그녀가 허락한 모든 것-스타, 배우, 그리고 김지미’의 한 대목은 그 이유를 짐작하게 합니다. “요즘에 자연인 생활을 하고 있지요. 저는 평생 이걸 못해 봤어요. 자식들이나 손자들 데리고 놀러 다니지도 못하고, 아무렇게나 편안하게 하고 다니지도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요즘은 너무너무 행복해요.”

자연인으로서의 행복을 깨는 인터뷰에 응하고 싶지 않은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회고전, 명예의 전당 입성식 등에 주인공으로 참여하는 것을 보면 그가 스타로서의 자리를 완전히 벗어던지진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 70세의 노배우가 오랜만에 귀국해서 보이는 행보에 ‘자의반 타의반’의 균열이 있는 것이지요.

그는 선배 배우인 고 김승호씨로부터 ‘지랄같은 후배’라는 말을 들었을 만큼 괴팍한 일면을 지녔지만, 매사에 분명한 언행을 하고 약삭빠르게 굴지 않으며 늘 담대한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이번 책에 부록으로 수록된 옛 기사들은 김씨의 그런 면모가 영화에 데뷔할 때부터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원로 평론가 김종원씨를 비롯한 4명의 영화 전문가들이 집필한 이 책은 김씨의 영화 인생을 총체적으로 다루며 그 속에 숨어 있는 미묘한 균열을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저자들은 김씨가 20세기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1970년대까지는 상업영화 시스템에서 빛을 발했던 ‘스타’였지 ‘배우’는 아니었다고 평가합니다. 진정한 연기자로 거듭난 것은 그가 40대 중반에 ‘길소뜸’(1985)에 출연한 이후부터라는 것입니다.

‘길소뜸’이라는 영화가 특별한 것은, 김씨의 육성이 동시 녹음됐다는 점에도 있습니다. 이전 영화에서 그의 목소리는 대부분 고운 음색을 지닌 성우가 대신했습니다. 대중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미모’의 여배우 얼굴과 성우의 청아한 목소리를 함께 떠올렸던 것이지요. 그의 진짜 목소리는 미모에 어울리지 않게 거친 듯한 탁성입니다. 그런 탁성이 ‘영화와 딱 붙는 순간’(임권택 감독 표현)을 맞아 진정한 배우로 거듭났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영화인생은 늦가을에 접어들고 있었지요.

본래 이름이 명자(明子)인 김씨는 만 17세에 은막에 데뷔하며 ‘지미(芝美)’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난초같이 청초한 외모를 지녔대서 붙여진 이름인데, 기실 그는 장미처럼 화려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와 함께 연기를 했던 당대 최고의 남자 배우들도 그의 외모가 지극히 아름다웠다며 한결같이 찬사를 보냅니다. 그런 점에서 ‘지미(芝美)’는 ‘지미(至美)’와 같은 이름입니다. 지극한 자존심으로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치장하려고 애썼다는 점에서도 그는 지미(至美)였습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숨어 있는 불기운에 주목합니다. 이 불기운은 그에게 한 시대를 매혹시킨 스타성을 부여했으며, 4명의 남자와 살다가 헤어진 개인사의 굴곡을 이기게 하는 힘이 됐습니다.

20세기 한국인들은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소녀 시절의 꿈을 접고 배우가 된 한 여성과 반세기를 함께 울고 웃었습니다. 21세기엔 그만한 배우로 누가 기록될 수 있을까, 책을 덮으며 생각해 봤습니다.

장재선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