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광장>아이들과 함께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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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 소설가

며칠 전 고향의 한 초등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 주말에도 고향에 오시냐고 묻고, 시간이 되면 일요일에 학교 아이들과 함께 대관령 옛길을 걸어주십사 하는 부탁이었다. 햇수로 삼년째 주말마다 고향에 내려가 전국에서 찾아오는 도보 여행자들과 함께 ‘강원도 바우길’을 걷고 있는지라 따로 시간을 내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학교에서 일부러 부탁을 해온 건 내 소설 가운데 한 작품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때문인데, 내용 역시 초등학생인 아들과 함께 오랜 시간 대관령 옛길을 걸으며 우리의 삶과 자연에 대해, 또 친구 간의 우정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이들로서는 자기들이 배우는 책에 나오는 ‘부모님과의 걷기 대화’를 책에 나오는 무대에서 책에 나오는 것과 똑같이 실천해보는 것이었다. 나도 학교의 부탁에 흔쾌히 응하며 아이들만 나오지 말고 부모님들도 아이들 손을 잡고 꼭 함께 나오라고 말했다.

가족 간의 대화야 집에서도 할 수 있고, 차 안에서도 할 수 있고, 식사를 하면서도,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서로 필요한 것, 바라고 요청하고 당부하는 말들만 하거나 대개의 경우 그것조차 하지 않는 가정도 많다.

나 역시도 아이들이 자랄 때 그랬다. 그러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대관령 꼭대기에서부터 산 아래 할아버지 댁까지 일부러 자동차를 버리고 아이와 함께 걸어 내려가며 이제까지 집에서 나누지 않았던 긴 대화를 했고, 나중에 그걸 다른 사람들도 이랬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에 한편의 소설로 썼던 것이다.

세상엔 오랜 역사가 담긴 길이 참 많다. 강원도 바우길의 한구간인 대관령 옛길도 아주 오랜 역사가 담긴 길이다. 우리가 잘 아는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그 길을 넘어 서울과 강릉을 오가고, 송강 정철이 그 길을 넘어 ‘관동별곡’을 쓰고, 단원 김홍도가 대관령을 넘던 중에 경치에 반해 길모퉁이에서 화구를 펼쳤던 아주 유서 깊은 길이다.

아이 쉰 명에 어른 쉰 명을 더해 백 명 넘게 길을 걸으러 나왔다. 아이들과 함께 길을 걸으면 좋은 것이 처음엔 따로 걸어도 어느 지점에선가 아이와 부모가 자기들도 모르게 손을 잡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대관령 옛길같이 포장되지 않은 산길은 부모의 염려와 아이들의 조심스러운 마음이 처음부터 손을 잡고 길을 걷게 한다. 자연히 이제까지 집에서 나누지 않았던 대화를 오랜 시간 함께 걷는 길 위에서, 또 자연 속에서 나누게 되는 것이다.

길 중간에 신사임당이 대관령 고개를 넘던 중간 친정어머니가 계시는 오죽헌 마을을 바라보며 쓴 ‘사친시’를 그림과 함께 크게 그려 담은 시비 앞에서 아이들에게 큰소리로 그것을 읽게 했다. 커다란 안내판에 세로로 쓴 시를 어떤 아이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로 읽고, 또 어떤 아이들은 가로쓰기의 글을 읽듯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기도 했다. 그런 실수조차 귀엽고 즐겁게 바로 잡아주는 곳이 바로 자연 속의 학교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자연 속의 점심 시간은 또 얼마나 즐거운가. 가족이 함께 걸으러 가는 길도 소풍길이고, 자동차를 세워두고 그 다음부터 두 발로 걸어오는 길도 소풍길이다. 아이들은 부모님의 손을 잡았다가 친구의 손을 잡았다가 나무의 손을 잡는다. 그 길 위에 색색으로 피어나는 봄꽃들은 또 얼마나 즐겁고 귀한 자연의 축제인가.

길을 다 걸은 다음 모두 한 곳에 모인 자리에서 한 아이와 함께 교과서에 나온 ‘아들과 함께 걷는 길’ 이야기를 낭독했다. 마침 그 부분이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로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대목이어서 방송극을 하는 성우처럼 아이 한 줄 어른 한 줄 읽었다. 그런 작은 낭독회 역시 아주 특별한 행사처럼 여겨지는 하루였다.

봄이다. 자연은 겨울 외투를 벗고 새봄의 푸른 옷을 갈아입는다. 바람이 부르고 꽃이 우리를 부른다. 시간이 없다고, 귀찮다고 말하지 말고 아이와 함께 부부가 함께 자연 속에 나가서 길을 걸어 보라. 걷다 보면 우리가 걷는 것이 그냥 자연 속만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 한가운데임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