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광장>사라예보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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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리 서양화가

4년 전, 말로만 듣던 발칸반도 여행을 했다. 루마니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슬로베니아 등 이름만 들어도 좋은 그 나라들을 두루 돌아보고 돌아와서 한동안 눈에 밟힌 곳은 내전의 상처로 얼룩진 보스니아의 풍경이었다. 그리고 올해 봄, 발칸을 다시 찾았다.

우선 비행기는 오스트리아의 빈에 도착했다. 몇 년이 지나도 빈은 한결같은, 변치 않은 모습으로 손님을 맞는다. 서울이나 뉴욕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도시와 빈이나 베네치아처럼 변하지 않는 도시의 차이점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변해 가는 도시는 젊은 도시이고, 변치 않는 도시는 늙은 도시인지 모른다. 여행을 통해 나는 늙음과 젊음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생각한다. 늙음이 주는 지혜와 젊음이 주는 용기를 합친다면 불가능이 없을 것이다.

여행은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는 생각여행이기도 하다. 빈을 다시 둘러보며 히틀러가 시험에 불합격했다는 빈미술학교를 지나간다. 지금도 보존돼 있는 미술학교 시험 결과 서류에는 히틀러의 불합격 요인이 간단하게 이렇게 쓰여 있다 한다. ‘재능 없음’. 히틀러가 미술학교에 합격만 했더라도 세상은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2년 연속 히틀러를 미술학교 시험에 떨어뜨렸던 미술대학 노교수는 이런 저런 죄명으로 많은 지식인과 함께 이후 4년간 감옥에 연금됐다 한다. 히틀러가 독일인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인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빈에서 5시간, 버스는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 도착했다. 다시 본 발칸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우리나라 꽃들을 뒤로한 채 남의 나라 꽃들을 구경하는 게 아쉽기도 했지만, 세상 어디나 봄은 왔고, 꽃들은 다퉈 피었다. 꽃들 속을 가로질러 버스로 6시간이면 내전의 상처로 얼룩진 보스니아의 슬픈 도시 사라예보에 도착한다. 유럽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매력적인 도시 사라예보는 4년 전 갔을 때보다 밝아 보였다. 그러기를 바라는 내 마음 때문이었을까?

사람들의 얼굴도 밝아진 듯하고, 도시의 어두운 그림자도 옅어진 듯했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로는 사라예보의 상처를 어루만지기엔 너무 약하다. 가족 중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이 대부분인 슬픈 도시 사라예보에 봄이 와서 온 세상이 울긋불긋했다. 가운데 내륙 평지를 뺑 둘러싼 산들 위에 조그만 집들이 빼곡한 동화처럼 아름다운 도시 사라예보는 우리 동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을 생각나게 했다.

중앙시장이라는 뜻의 ‘바슈카르지아’는 상점들과 카페들이 밀집돼 있는 매력적인 골목들이 이어진다. 지금은 평화롭기 짝이 없는 그곳을 천천히 거닐며 나는 산 위에서 쏘아대는 총소리를 듣는다. 산꼭대기로 둘러싸인 분지 스타일의 특이한 지형 탓에 일거수 일투족 적에게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전쟁 당시 사람들은 땅굴을 파서 그곳을 빠져나가고, 음식과 물을 들여 왔다 한다.

세르비아 무장군인들이 산 위를 모두 점령하고 꼼짝없이 포위된 산 아래 평지에 사는 민간인 회교도들을 향해 허구한 날 총을 쏘아대던 4년 동안 내전의 상처가 이제는 조금이라도 아물었을까? 전쟁이 끝난 지 16년째다. 그 당시 세르비아 군인에게 집단 강간을 당했던 수많은 보스니아 이슬람계 여인들은 집단 수용돼 원치도 않는 아기를 낳았다. 출생의 비밀을 모른 채 자라기도 했을 그 아이들 또한 이제는 젊은이가 돼 갈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상처는 겉으로 아물 뿐, 속으로는 더욱 깊어질지 모른다. 복잡한 남의 나라 상황이라 보스니아 내전은 우리에게 이미 잊어진 전쟁이다. 세상에는 매일 다른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곳곳에서 전쟁만큼 무서운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있으며, 오사마 빈 라덴도 힘없이 사라지는 세상이다.

세상 어디에나 흐드러지게 핀 꽃들을 바라보며, 문득 머리에 꽃을 꽂고 반전을 외치며 걸어가는 1960년대 히피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플라워 칠드런’이라 불리던 그들처럼 나도 머리에 꽃을 꽂고 반전을 외치며 세상의 길들을 걸어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