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유안진 시인은 “시란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되는 걸로 알아 왔다”면서 “자신이 쓴 시가 어느 정도 모였다고 묶어서 시집을 내는 것은 독자에 대한 모독이며, 시집마다 변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연수기자 nyskim@munhwa.com
곱디곱다. 일흔의 노시인에게 실례되는 표현일지 모르지만 유안진(70) 시인을 마주 대하면 단박에 떠오르는 느낌이다. 거두절미, 그 비결부터 물었다. “뭐, 비결이랄 게 있나요. 에어로빅을 한 지 벌써 20년이 넘었어요. 1988년부터 꾸준히 에어로빅을 해 왔지요. 구청 문화센터에서 운동하는데 한 달 수강료가 4만원밖에 안 한답니다.”
하지만 유 시인의 ‘고움’이 어디 운동 때문만이겠는가. 그의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시인의 고운 심성이 밖으로 드러난 결과임을. 예컨대 지난 6월 유 시인이 펴낸 시집 ‘둥근 세모꼴’에 실린 시 ‘자랑거리’를 보자. “아기 안은 엄마를 구경하던 원숭이가/ 쪼르르 달려가더니/ 제 새끼를 안고 와 보여 준다.”
동물원 원숭이 우리에서 벌어진 한 장면이 손에 잡힐 듯 그려져 있다. 시인은 오히려 인간을 구경하는 원숭이의 시각에서 시상을 떠올렸다. 새끼를 안고 와 보여 주는 어미 원숭이의 자랑스러운 눈망울이 선연하다. 이런 심성을 가진 시인이니 어찌 곱지 않을 수 있을까.
지난 8월29일 서울 중구 충정로1가 문화일보사에서 만난 시인에게 어릴 적 추억부터 물었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유 시인은 그곳에서 초등학교까지 마치고 대전으로 이사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께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배웠지요. 증조모님은 내방가사를 외우게 하셨고요. 안동에서 ‘진사댁’으로 불리는 집안이었어요. 고조부께서 진사를 하셨으나 조선조 사화(士禍)를 피해 홀로 도망쳐 온 소년의 후예로서, 벼슬길은 금기시되는 문중이었어요. 증조부는 기미년 만세운동 때 이십오륙 세의 한창 나이에 만세를 부르다 왜경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어요. 당시 다섯 살짜리 조부와 세 살짜리 젖먹이 딸아이를 둔 증조모님은 청상과수로 남매를 키우셨어요.”
사연이 구구절절하다. 그는 어릴 적 조부가 한시를 읊는 것을 보면 어린 마음에 “할아버지, 노래하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시인이 되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증조모와 할머니, 어머니가 가르쳐 준 내방가사 또한 시를 쓰는 환경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그만큼 어릴 적 경험이 시인의 길로 들어서는 데 결정적이었던 것이다. 추석을 앞두고 시인에게 고향에 대한 회상 한 자락을 들려 달라고 청했다.
“골목마다 아롱점박이로 익어 가는 풋대추마을, 담 너머로 풋감알 오지리 자지리 매달린 감나무 가지들, 아이들은 신이 나 앞·뒷산에 올라 솔가지의 솔잎을 따고 풋콩과 풋밤을 갈았지요. 송편도 쑥물로, 치자와 지초 우려낸 물로 반죽한 쑥색 송편, 노란 송편, 붉은 송편을 색깔별로 만들었어요. 송편소는 주로 풋콩, 풋밤이었지만 깨소금이나 채 친 대추를 넣기도 했고, 장난삼아 고운 재 가루나 고춧가루도 넣어 먹는 사람들 골탕 먹이기도 했어요.”
그야말로 우리네 옛 풍경이다. 시인의 말을 그대로 받아 적으면 한 편의 시가 될 것 같다. 하지만 한가위가 이처럼 아련한 추억만 떠올리는 것은 아닐 터.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하다 보면 어찌 회한이 없을 수 있겠는가. 시인 역시 이 같은 회한의 심사를 한 줄 시로 읊었다.
시 ‘벌초, 하지 말 걸’에서 시인은 “떼 풀 사이사이/ 패랭이 개밥풀 도깨비바늘들/ 방아깨비 풀여치 귀뚜라미 찌르레기 소리도/ 그치지 않았는데/ 살과 뼈 녹여 키우셨을 텐데// 다 쫓아 버렸구나/ 어머니 혼자/ 적적하시겠구나”라며 절절한 심사를 토로했다.
시인에게 어머니는 항상 그리움의 대상이다. 세 딸과 세 아들을 낳은 어머니는 아들들이 모두 어려서 죽자 졸지에 딸만 낳은 아내가 돼 버렸다. 옛 시절이다 보니 ‘대를 끊은’ 며느리가 된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소실을 들였고, 맏딸이었던 시인은 가슴에 못이 박혔다.
“당시만 해도 어머니가 친정 나들이를 할 땐 가마를 타고 가던 시절이었어요. 그 좁은 가마에 어린 딸까지 태우고 가셨지요. 재밌는 얘기 하나 해 줄까요. 먼 길을 가다 보니 가마에 요강이 필수품이었어요. 가마에서 소변을 보라는 거지요. 그런데 요강 밑바닥엔 콩을 깔았어요. 왜 그랬겠어요? 소변 보는 소리가 나지 말라는 거지요. 나중에 내릴 때가 되면 콩이 다 불어 오줌은 온데간데없었어요. 호호”
유 시인은 박목월(1916~1978) 시인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나왔다. 박 시인의 추천으로 월간 ‘현대문학’에 시 ‘달’ ‘별’ ‘위로’가 3회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당시의 일화가 없을 수 없다.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다니던 1963년 무렵이었다. 유 시인이 대학 백일장에서 쓴 시를 당시 심사위원을 맡았던 박 시인이 보고선 ‘시작(詩作) 노트를 갖고 연구실로 한번 놀러 오라’는 엽서를 보냈다. 이 엽서를 안고 밤새운 유 시인은 용기를 내어 당시 박 시인이 재직 중이던 한양대로 찾아갔다.
“안 계시기를 기도했어요. 너무 떨렸던 거지요. 연구실 앞에서 차마 노크도 못하고 계속 서 있었답니다. 선생님께서 점심 드시러 나오시다가 저를 보고선 ‘따라오라’고 하시더군요. 옛 화신백화점 뒤에 있던 유명한 설렁탕 집으로 따라가 마주 앉았지요. 둘 다 설렁탕을 시켜 먹는데 선생님께서 소금을 당신 그릇 옆에 놓고 저에게 주지 않으시는 거예요. 감히 ‘소금 좀 주세요’라는 말이 나와야지요. 소금도 치지 않고 맨 설렁탕을 먹었지요.”
박 시인은 뻔히 그런 줄 알고 있었다. 안 보는 듯 다 본 것이다. 이후 박 시인은 당시 일을 회상하며 쓴 수필에서 “저런 숙맥(菽麥·콩과 보리도 구별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니 시는 제대로 쓰겠다”며 유 시인의 자질을 평가했다. 유 시인은 스승에 대해 “자상하면서도 엄한 분이셨다”며 “좀체 추천을 안 하시는 분인데, 과분하게 저를 추천해 주셨다”고 그와의 인연을 고마워했다.
유 시인은 ‘시란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로워지지 않으면 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새로운 주제와 기법으로 쓴 시라야 ‘신작’ 시집이란 이름을 걸고 펴낼 수 있다는 것. 또한 시란 ‘거짓말로 참말하기’라고 여긴다.
자신의 시집 제목으로도 쓰인 이 명제에 대해 유 시인은 “늘 거짓말로 참말하려 하고, 부정함으로써 긍정하려 하고, 패배함으로써 승리하고 싶다”며 “결국 시인이란 넘어짐으로써 일어서려 하고, 나약하기 때문에 강인해지고 싶고, 어리석음이 지혜라고 믿고 싶고, 게으름이 중요한 일 하는 자라 믿고 싶고, 꿈꾸는 것이 행동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은 자가 아닐까”라고 밝혔다. 그래서 유 시인은 ‘시도 다수결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시에서 “예술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천상천하 유아독존주의(天上天下 唯我獨尊主義)다/ 다수결(多數決)은/ 독창성(獨創性)의 적(敵)이라서”라고 읊었다.
지난 2006년 정년을 1년 앞두고 유 시인은 서울대 교수직을 퇴임했다. 시 창작에 어떤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유 시인은 “국립대 교수직이란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이 많은지 모른다”며 “이것저것 다 벗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고 털어놨다. 교직에서 해방된 유 시인은 이제 온전히 시작(詩作)에 몰두하고 있다.
그 결과 지난해엔 구상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유 시인은 상금 5000만원 중 절반이 넘는 금액을 안동재활원에 기부했다.
요즘 유 시인은 석·박사 과정의 학생, 시인들과 함께 시 합평회 모임을 갖고 있다. 1주일에 한 편씩 쓴 시를 이름을 가리고 발표한 후 서로 평가하는 자리다. 누가 쓴 시인지 모르니 자연 비평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다. 열서너 명 되는 회원들이 한 번 모임을 가지면 보통 서너 시간은 걸린다. 그만큼 진지하게 서로의 시에 대해 비판의 칼날을 세운다.
주위에선 “젊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다 드러내다니, 유안진이 참 대단하다”며 혀를 내두른다. 자신을 내려놓지 않고선 힘든 일이 분명하다.
“모두들 친하니까 서로 칭찬을 늘어놓을 때도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이러려고 만났느냐’며 오히려 목소리를 높입니다. 팽팽한 긴장감 없이 시가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겠어요?”
인터뷰=김영번 차장(문화부) zero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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