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광장>고맙다, 詩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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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소설가

한 사흘, 친구들과 하동에서 구례로 이어지는 섬진강변을 어슬렁거렸다. 정신없이 바쁜 중에도 꼭 가야 할 이유는 없었으나 헤아려보면 굳이 까닭이 없달 수도 없겠다. 어쩌면 이런 시 구절에서 촉발된 느닷없는 쓸쓸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갈수록, 일월(日月)이여,/내 마음 더 여리어져/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흘러가는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섬진강 하면 백일몽 같은 연분홍 벚꽃 무더기를 우선 떠올리겠지만 가을의 섬진강은 또 다른 얼굴로 여행자의 경탄을 이끌어낸다.

가르쳐주는 자 없는데 물은 어찌 계절을 아는 걸까. 저 홀로 깊고 서늘해진 강물 위로 수천마리 물새떼가 내려앉았다. 수면 위에 내린 햇빛이 물과 몸을 섞으며 빚어낸 빛의 새떼들이다. 보고 있자니, 아, 눈이 부셔라. 어떤 시인은 그 반짝임에서 타는 울음을 보았다.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겄네./저것 봐, 저것 봐….



하동포구에서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내려갔다. 그 물길 따라 참 많은 것들이 깃들어 살고 있다. 부드러운 둔덕을 이룬 차밭과 수확이 한창인 배나무, 멀리 보이는 대숲, 울창한 송림, 절정의 축제를 기다리는 꽃등처럼 붉게 매달린 대봉감. 강의 바닥에선 재첩과 참게가 살을 찌우고 있을 것이다. 강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의 눈은 찌가 아니라 먼데 산을 바라보고 있다.

강변의 억새들은 머리칼 끝부터 갈빛으로 투명하게 바래기 시작한다. 연약한 풀포기들은 일제히 바람이 부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 존재의 사소함이 애잔하다. 작은 것들은 스스로 무리를 지어 아름다워지는구나. 강변의 벚나무 잎들은 마지막으로 불타오를 색깔들을 응축한 채 절정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 풀과 이파리들이 어쩌면 이렇게 되뇌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내 몸 안에 무성했던 상처도/저렇게 노랗게 말랐으리.



지리산의 품은 깊고 넉넉하다. 철학자와 경제학자, 과학수사 전문가와 신흥종교 교주, 사성장군과 빨치산의 딸이 함께 한 여행길이었다. 도시 한복판 어느 세미나실에서 만났더라면 일합을 겨루었겠으나, 말의 칼은 그림자가 되어 흩어졌다.

지리산 자락의 조그만 여관에서 자고 계곡의 물소리에 깨어 일어나 칠불사를 찾아 올라갔다. 김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성불을 했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다. 한번 불을 때면 온기가 두 달을 간다는 온돌방에 마음이 끌리는 걸 보면 가을이 깊었나보다. 절터에서 산 아래 계곡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자니, 어떤 문장이 떠오른다.

보아라, 이 지상의 것이 아닌 위대함이 저기 있지 않으냐?

내가 막 하려던 말이나 안타깝게도 이미 괴테가 가을숲을 보며 흘린 탄식이다. 산을 내려오는 길, 골짜기 사이로 아침밥 짓는 연기가 정겹게 피어오른다. 우리네 삶은 저 산정이 아니라 골짜기 사이에, 강이 쉬 흐르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래톱 언저리에 머물 것이다.

그렇게 쉬엄쉬엄 다니며 풍경의 모서리를 돌 때마다 오래 전 읽은 시(詩)의 구절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지금 우리 곁을 스쳐가는 이 계절의 속살을 만져보고 싶다면 위에 나온 시의 전문을 찾아 읽어볼 일이다. 시인의 이름도 외워볼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고맙다, 시야. 네가 아니었다면 어떤 빛나는 정경에 맞닥뜨리고도 어어, 오오, 의미 없는 비명만 헛되이 질러댈 뻔했다. 그 저리도록 아름답고 아픈 시편들 덕분에 나는 막 투명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