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입니다>“선수 집단이탈은 역전패 당한 팀 ‘빠따’ 주려다 생긴 우발 사건”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야구장은 윤동균 전 OB베어스 감독에게 안방처럼 편하고 익숙한 곳이다. 21일 시범경기가 진행 중인 잠실구장에서 윤 전 감독이 포즈를 취했다. 정하종기자 maloo@munhwa.com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를 말하면서 윤동균(63)을 빼놓을 수 없다. 강타자, 술 잘먹는 ‘싸나이’, 다혈질 ‘맏형’, OB베어스(현재 두산베어스)의 ‘큰곰’…. 실업야구의 ‘레전드’였던 윤동균은 당시로선 늦은 나이인 서른셋에 프로시대를 맞았고 OB 원년 우승의 주역이 됐다. 프로선수 출신 처음으로 40대 초반에 사령탑을 맡아 지도자의 길을 순탄하게 밟다가, 사상 전무후무한 선수 집단이탈 파동으로 이른 시기에 날개를 접었다.

21일 시범경기가 한창인 잠실구장의 일구회 사무실에서 윤 전 감독을 만났다. 인터뷰 전에 관중석에서 사진 촬영을 먼저 하자고 했다. 그는 한국야구위원회(KBO)의 주요 직책인 기술위원장과 경기운영위원장 등으로 활약하며 늘 야구판의 중심에 있었지만, 관중들 사이에서 사진을 찍는 게 영 불편한 모양이다. 자꾸 ‘빨리 찍자’고 재촉하는 바람에 사진기자가 애를 먹었다. 평생 몸담아 온 곳인데도, 중도에 불미스럽게 지도자 생활을 접어야 했던 복잡한 속내가 그렇게 나타나는 걸까. 옛이야기부터 들어봤다. 그가 고교시절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투수였다는 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제 야구인생에 한 분수령이죠. 동대문상고 3학년 때인 1968년 춘계서울시고교야구에서 배명고를 상대로 고교야구 사상 네번째로 노히트노런을 세워 언론을 장식했어요. 그런데 당시 경기 기억이 잘 안 나요. 끝날 때까지 기록을 세웠는지도 몰랐고.”

―이 기록이 대학과 실업팀들의 구미를 당겼을 텐데요.

“당시에는 전국 우승을 독차지한 대구 경북고의 임신근(한일은행-삼성라이온즈 코치) 투수가 워낙 유명했어요. 그런데 제가 노히트노런을 하면서 ‘임신근 정도는 안 돼도 괜찮은 놈이 나왔다’고 해서 스카우트가 됐죠.”

대학이냐, 실업이냐의 갈림길에서 실업을 택했다. 당시 실업은 은행팀이 강했다.

“임신근 등 경북고는 전체가 최강인 한일은행으로 갔어요. 우리는 기업은행을 택했어요. 당시 기업은행의 선수 겸 투수코치가 김성근 감독이었어요.”

김성근(70·현재 고양원더스 감독)과의 인연은 그때부터 프로시절까지 이어진다.

“당시 김성근 코치는 저를 제구력은 없지만 볼이 빠르니까 투수로 키워 보려 했어요. 김 코치 집으로 잡혀 들어가서 하숙 아닌 하숙을 했어요. 그분 밑에서 고된 훈련을 했어요. 당시 중앙청 옆에 가회동에 살았는데, 오전 5시만 되면 뒷산에서 훈련을 하고 출퇴근을 붙잡혀서 다녔으니까. 그렇지 않았으면 선수생활을 오래 못했을 거예요. 은행이 돈을 잘 주니까, 맨날 술 마시느라 운동했겠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그분은 오직 훈련이잖아요.”

김 코치 집에서는 2년 가까이 있다가 나오게 되는데, 실업에서 투수보다 타자로 빛을 보면서 독립을 하게 됐다. 윤동균의 실업 선수생활은 화려했다. 3할대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는 교타자면서, 홈런을 수시로 쳐대는 강타자였다.

“1975년부터 국가대표로 뛰었어요. 그해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에서 타격왕, 또 네덜란드에서 열린 국제야구대회에서 타격왕에 올랐지요.”

윤동균은 20대 후반인 1977년 가을 포항제철이 창단되면서 이적했다. 서른이면 은퇴를 하던 때니까 노장이었다. 1980년부터 플레잉코치를 하다가,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을 맞게 됐다.

“무척 고민했어요. 33세였으니 은퇴할 나이였죠. 남아서 포철 감독을 하느냐, 느지막이 평생 소원인 프로 유니폼을 한번 입어 보느냐.”

창단을 준비 중인 프로팀들도 ‘노장’이어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최고참 33세 동갑내기가 김우열(현재 양평 리틀야구단 총감독)하고 저 둘인데, 선수 선발 마지막 날까지 MBC청룡과 OB베어스가 저울질을 했다고 해요. 결국 OB에서 선수가 모자라 우리 둘을 뽑기로 했대요. 늙었지만 기본이 있으니까, 한두 해는 써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죠. 계약금은 특급은 못 받고 A급을 받았죠. 그런데 솔직히 원년 우승할 때, 우리가 다했지. 허허∼.”

그건 사실이었다. 김우열이 프로 원년 전반기 홈런왕을 했고, 윤동균이 4할대의 백인천에 이어 타격 2위(0.342) 등 타격 전 부문 10걸에 이름을 올렸다. OB는 당시 중하위권으로 꼽혔지만 윤동균의 생각은 달랐다고 한다.

“당시 삼미슈퍼스타즈를 이겨 꼴찌만 면하자는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미안한 얘기지만, 당시 OB의 김영덕 감독·이광환 타격코치·김성근 투수코치 세 분은 고교야구 감독을 하다가 오셔서 실업선수 파악이 안 돼 있었어요. 구천서(49·현 한화이글스 코치)나 신경식(52) 등 당시 젊은 선수들이 얼마나 좋은 선수인지 몰랐던 거지. 내가 김 감독한테 ‘우리 우승할 수 있다. 멤버 좋다. 노장들이 역할을 하면 우승한다’고 했더니 웃고마시더라고요. 결국 제 말대로 됐죠.”

―원년 프로야구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프로라기보다는 실업의 연장이죠. 그때는 경기가 끝날 때마다 게임수당을 주니 선수들이 돈이 떨어질 날이 없었어요. 경기 끝나면 술 마시러 가는 게 일이고, 김성근 코치는 잡으러 다녔고… 허허. 한국시리즈 때도 술을 마셨으니까,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지.”

OB는 삼성라이온즈와 한국시리즈에서 만나 대구구장 1차전은 15회 연장 끝에 3-3 무승부, 대구 2차전은 0-9로 패하면서 패색이 감돌았다. 이틀 뒤 서울에서 3차전이 벌어지는데 구단에서는 당연히 서울에서 합숙할 것을 명했다.

“그런데 이광환 코치, 이민우 야구부장하고 고참 선수들이 ‘하던 대로 분위기를 이끌어 가야 한다’며 바로 서울로 안 가고 대구 수성나이트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어요. 지금 같으면 한심한 얘기지. 그러고도 서울에 와서 4연승한 거 아닙니까.”

―술 얘기가 나와 말인데, 술을 얼마나 드셨습니까.

“내가 술을 좋아하지만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많이 마시지는 않아요. 그랬다면 현역으로 마흔까지 어떻게 운동합니까. 제가 술 마시면서 속이기도 많이 했어요. 양주 먹는 척하면서 보리차 먹고. 술 마시면 후배들보다 1시간이고 먼저 경기장에 나와서 땀복 입고 러닝을 했어요. 그러니까 운동을 오래했지.”

OB에서 김성근 감독과의 재미있는 일화 하나. 1986년이었다. OB는 김성근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고 윤동균은 선수 겸 타격코치였다. 그때 고교와 대학의 스타였던 박노준(50)이 OB에 입단했다. 김 감독은 “저 폼으로 야구하겠나”라며 윤 코치에게 박노준을 집중적으로 지도하라고 지시했다.

“그때 제가 김 감독한테 되게 혼났어요. 제 딴에는 열심히 가르쳐도 감독님은 맘에 안 드셨겠지. 기껏 폼을 교정하면 김 감독이 따로 불러서 가르치고 있는 거예요. 몇 번 그러는 걸 보니 화가 치밀었죠. 맨 정신으로는 못하고, 술을 마시고 찾아가서는 ‘타격코치한테 맡겼으면 지켜봐야지, 왜 자꾸 노준이를 따로 가르치느냐. 나 못해 먹겠다’고 따졌죠. 다음 날 된통 혼쭐이 났죠.”

김 감독은 그러고서는 미안했던지, 박노준을 따로 가르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얼마 있다가 감독님 방에 보고할 게 있어서 들어갔어요. 그런데 방에서 감독님이 박노준을 불러 놓고 ‘요렇게, 요렇게’하며 폼을 지도하고 있는 거예요. 눈이 딱 마주쳤고, 오히려 내가 민망해서 나와 버렸죠. 김 감독은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하는 게 있잖아요.”

지금 들으면 코미디 같은 에피소드지만, 김성근 감독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여기까지 신나게 얘기가 진행됐는데, 그는 갑자기 “‘사건’은 얘기하지 맙시다”라며 표정을 짓궂게 바꾼다. 1994년 선수 집단이탈 사건은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1990년과 1991년 OB는 최하위로 추락했고, 윤동균은 1991년 후반기에 지휘봉을 물려받았다. 윤 감독은 1992년에 5위, 1993년에는 3위까지 팀 성적을 끌어올리며 젊은 사령탑으로 가능성을 드높였다. 그런데, 감독으로 부임하고 정확히 3년째인 1994년 9월 초 프로야구 초유의 사태인 선수 17명 집단이탈 사건이 벌어졌다. 전주에서 열린 쌍방울과의 경기에서 맥없이 역전패당한 뒤 호텔에서 팀 미팅을 하면서 선수들을 다그친 게 화근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그래 왔듯, 별다른 변명은 안 했지만 짙은 회한은 감추지 못했다.

“지도자로 경험이 적다 보니 제 잘못이죠. 엊그제까지 형·동생하던 선수들이고 해서 거친 말도 부담없이 했던 건데…. 그날이 투수 이용호의 1군 데뷔전이었는데, 우익수가 술이 덜 깨 쉬운 플라이볼을 놓쳐 경기에 졌어요. 그게 더 화가 났죠. 수석코치에게 몽둥이를 가져오라고 했어요. ‘너희들은 좀 맞아야겠다, 주장 김상호 나와라’ 하니 ‘못 맞겠다’ 하고, 박철순도 ‘못 맞겠다’, 이어 14명이 못 맞겠다고 손을 들었어요. 수석코치에게 ‘얘네들 목욕시켜 차 태워 올려 보내’라고 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정말 올라가 버린 거지. 사령관이 야단치고 나오면 부사령관이 다독거려 심기일전했으면 끝날 일이 커져 버린 거지. 나중에 붙잡으려 톨게이트까지 쫓아갔지만 못 잡았죠.”

―당시 주동한 것으로 보도된 박철순 선수 등은 원년 우승 멤버이자 친한 후배이기도 해서 더 섭섭했을 거 같은데.

“세월이 흘렀고 이제는 다 잊어버렸어요. 나중에 죄송하다고 인사한 친구들도 있고.”

―그 일 때문에 지도자 생활을 계속 이어가지 못했는데.

“그해에 사인만 안 했지 재계약을 한 상태나 마찬가지였어요. 이듬해부터 감독 연봉도 억대로 오를 시기였죠. 설마 그때 그런 일이…, 생각도 못했죠.”

윤 감독이 이 사건의 파문으로 사표를 낸 뒤 야구 선배인 김인식(65·KBO기술위원장) 전 쌍방울 감독이 지휘봉을 이어받았다. 김 감독은 부임 첫해에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윤 전임 감독이 팀을 3년간 잘 다져 놓은 게 그해 우승의 밑거름이 됐다고 볼 수 있다. 마침 인터뷰하는 일구회 사무실에 김인식 위원장이 와 있었다. 윤 전 감독은 “형님, 그게 맞아요”라고 물었고 김 위원장은 “내가 당신 덕을 본 거지~”라고 받아줬다.

끝으로 “야구 안 했으면 뭐 했을까요” 라고 물었는데, 이번에도 김 위원장이 “가수나 건달이 됐을걸?”이라고 대신 대답했다.

“현역부터 내가 다혈질이었어요. 팔짝팔짝 뛰고, 운동장에서 악착 같았죠. 그걸 두고 ‘건달’ 운운하시는 거지. 평생 야구만 했으니 뭘 했을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앞으로도 야구하고 살 거고. 허허.”

인터뷰 = 엄주엽 부장대우(체육부)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