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더블클릭!>잡동사니 창고 전락한 장애인 화장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26일 서울 종로구의 한 건물 장애인 화장실이 청소 도구로 가득 차 있다. 김연수기자 nyskim@munhwa.com

“장애인들 오면 치워 주면 되는 것 아닌가요? 청소 도구실이 작아 이곳에 청소 물품을 보관 중인 것뿐인데….”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OO동의 한 오피스 건물에서 만난 청소 노동자 김모(60)씨는 청소 도구들을 챙기기 위해 평소처럼 건물 1층 장애인 화장실로 들어갔다. 김씨를 따라 들어간 가로 3미터 세로 2미터 넓이의 장애인 화장실 안에는 각종 청소 도구와 청소 약품들이 널려 있었다.

흙먼지와 소변 잔여물이 묻은 대걸레 두 개는 변기 손잡이에 걸쳐 있었고, ‘피부에 닿을 경우 자극을 일으키고 삼키면 유해함’이란 경고 문구가 붙은 화장실 타일용 왁스는 뚜껑이 열린 채 변기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각종 오물과 휴지가 담긴 대형 쓰레기통은 화장실 미닫이문이 열리는 쪽에 놓여 휠체어 출입을 방해했다.

김씨는 “평소에 화장실을 사용하는 장애인을 거의 볼 수 없다”며 “장애인 화장실이 워낙 널찍하니까 몇 가지 청소 도구가 들어가 있어도 장애인들이 화장실을 사용하는 데 큰 불편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장애인이 세면대를 이용할 때 잡는 보조 손잡이에 보란 듯이 걸어 놓은 고무장갑과 걸레를 집어 밖으로 나갔다.

장애인들을 위한 장애인 화장실이 청소 도구실로 전락하고 있다. 장애인 화장실은 장애인들의 편의를 위해 일반 화장실의 3∼4배 크기로 설치됐지만 사용 빈도가 적다 보니 미화원들이 각종 청소 도구를 보관하는 용도로 쓰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미화원은 문제점을 지적해도 ‘장애인 화장실에 장애인은 안 온다’, ‘휠체어를 탄 사람이 오면 치워 주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별일 아니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청소 도구실에서 용변을 해결해야 하는 장애인들은 마치 본인이 청소 도구인 것처럼 느껴져 기분이 상하기 십상이다. 장애인들을 위한 장애인 화장실이 오히려 장애인에게 불쾌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서울역에서 만난 장애인 최모(34)씨는 “일반 건물은 장애인 화장실이 없는 경우가 많아 불편한데 어렵게 장애인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보면 청소 도구가 쌓여 있어 불쾌하다”며 “장애인들을 정녕 위한다고 하면 사용 빈도가 낮더라도 청소 도구를 치워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같은 날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의 한 쇼핑 상가에 있는 장애인 화장실도 상황은 비슷했다. 입주 상가인만 100여명이 넘는 이 건물 1층에 설치된 장애인 화장실은 변기 옆에 설치된 보조 손잡이가 없었다면 장애인 화장실이라고 알아차릴 수도 없을 만큼 시설 관리가 미흡했다. 변기 위에는 아예 쓰레기통과 대걸레가 올려져 있어 사용 자체가 불가능했다. 세면대 옆 보조 손잡이도 고무장갑이나 비닐봉지 걸이로 사용되고 있었다. 장애인 화장실에서 이를 닦고 있던 박순양(여·54)씨는 “여긴 청소하는 아줌마들 창고로만 쓰지 장애인 화장실로 안 쓰인다”며 “변기 커버도 제대로 없는데 누가 여기서 볼일을 볼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상인 이경자(여·66)씨 역시 “이곳에서 7년 넘게 장사를 했는데 장애인들이 화장실을 이용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며 “공간을 버리는 것보다는 청소하는 분들이라도 사용하면 좋은 일 아니냐”고 말했다.

장애인협회를 비롯해 관련 시민단체들은 사실상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인 장애인 화장실을 제대로 관리해 달라고 지방자치단체에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행정 당국은 별다른 제재 수단 등이 없어 실효성 있는 단속을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전철역이나 관공서 등 공공건물에 있는 장애인 화장실은 행정 당국이 관리를 한다고 해도 일반 건물에 딸린 장애인 화장실 관리 의무는 전적으로 건물주에게 있기 때문에 효과적인 관리 점검이 불가능하다.

노숙인이 많은 서울역과 영등포역의 장애인 화장실은 노숙인들의 쉼터처럼 이용되고 있었다. 26일 오후에 찾아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 장애인 화장실은 입구에서부터 소주 냄새와 악취가 풍겼다. 일반 화장실은 창문을 열어 두면 환기가 가능하지만 장애인 화장실의 경우 밀폐된 공간이기 때문에 환기가 쉽지 않아 각종 악취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장애인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한 남성 노숙인이 술에 취해 바닥에 누워 있었다. 이 남성은 여성 미화원이 들어오자 마지못해 밖으로 나갔다.

영등포역 화장실 청소를 담당하는 이모(여·58)씨는 “한 시간마다 한 번씩 청소를 하지만 청소가 끝나고 나면 노숙인들이 끊임없이 들어온다”며 “장애인 화장실은 안에서 문을 닫으면 밖에서 열 수 없어 쫓아내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영등포역 청소관리장을 맡고 있는 오제철(62)씨는 “영등포역 주변에 노숙인이 원래 많기도 하지만 장애인 화장실 안에 히터와 세면기 등이 마련돼 있어 본래 목적과는 다르게 노숙인들이 쉬는 용도로 사용된다”고 전했다. 그는 “노숙인들이 안에서 소주를 마시고 병을 치우지 않아 냄새가 고스란히 남는다”며 “역설적이지만 장애인 화장실은 장애인보다 노숙인들이 더 많이 사용한다”고 밝혔다.

박정경·김대종·정철순기자 verit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