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리고 희망 - 2012 대한민국 리포트>‘친절한 한국’ 국격 향상… 다문화 시대 ‘언어장벽’ 허문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유장희(오른쪽) BBB코리아 회장이 지난 19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BBB코리아 사무국에서 일본어 자원봉사자 성민주(24)씨와 함께 휴대전화로 통역봉사를 하는 모습을 재연해 보이고 있다. 김연수기자 nyskim@munhwa.com

얼굴 없는 자원봉사자들 4000여명이 거미줄 같이 연결된 휴대전화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통역 재능기부를 펼치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통역이 필요할 땐 전화번호만 누르면 된다. 생소한 이름의 비정부기구(NGO) ‘BBB코리아’의 이야기다. BBB 봉사자들은 자신의 외국어 능력을 활용해 언어장벽에 부딪힌 내·외국인 간 소통을 도와주기 위해 24시간 개인의 휴대전화를 통해 무료 통역 봉사를 하고 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뿐만 아니라 베트남어, 몽골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등 18개 외국어 통역이 가능하다. BBB는 ‘Before Babel Brigade’의 약자로 ‘바벨탑 이전의 언어 장벽 없는 세상’을 의미한다.

일본어 자원봉사활동가 김영국(66·서울 송파구)씨는 ‘BBB코리아’를 통해 지난 7일 오전 10시40분쯤 경북 경주경찰서의 통역 요청을 받았다. 경주 보문호수 주변에서 열린 벚꽃 마라톤행사에서 세 살 난 자녀와 함께 뛰던 일본인 부부가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경찰에 신고를 했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씨는 “아이의 옷차림과 잃어버린 상황 등을 일본인 부부로부터 듣고 경찰관에게 알려주는 등 신고 내용을 일일이 통역해 준 일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말했다.

영어 통역 자원봉사활동가 조현욱(34·서울 동작구)씨는 최근 필리핀 여성과 결혼한 B씨로부터 전화를 받고 부인과 대신 통화를 해줬다. 다문화지원센터 등에 가면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지만 집에서는 말도 없이 울기만 한다는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부인과 통화해 보니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B씨는 “BBB 통역을 통해 아내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된 것 같다”며 BBB 측에 감사의 말을 전해왔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이어령 고문의 아이디어에 의해 창안된 BBB 코리아는 초기에는 ‘BBB운동’으로 한시적인 캠페인 성격으로 시작됐다가 월드컵 기간 두 달간 약 2만 건의 통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지속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됐다. 이에 2003년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독립 NGO로 공식 출범, 유장희 회장을 필두로 문화·관광 인사들 및 외국어 전공 교수진, 40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의 참여로 현재까지 이어져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10년 전인 2002년 당시에만 해도 기부의 개념이 물질적인 것에만 국한돼 있을 때 재능기부 운동에 앞장서 온 점도 눈에 띈다.

BBB 통역을 이용하는 건수는 점점 늘고 있다. 국내 외국인 비율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BBB 콜 요청 건수는 2011년 기준 총 5만6299건으로 BBB 운동 시작 첫 해인 2002년(2만606건) 대비 2배 이상 증가했다. 특히 국내에 140만~150만 정도의 다문화 인구가 형성되면서 BBB 통역의 역할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실제로 베트남어의 경우 2004년 요청건수가 37건에서 2011년 7650건으로 기하급수적인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다. 베트남어 자원봉사활동가 김은수(63·서울 강서구)씨는 “일본에 사는 한국인 남성 A씨와 베트남 아내의 가정불화 문제로 통역 요청을 받았는데, 한 시간가량의 실랑이 끝에 결국 오해를 풀고 화해하게 됐다”면서 “정말 뿌듯했다”고 말했다.

BBB는 또 택시·병원·백화점 이용 등 일상생활에서의 통역부터 소방서와 경찰서에서의 응급·위급상황, 외국인 근로자와의 심층대화까지 폭넓은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의 경우 택시, 숙박업소 등 기본생활 및 백화점, 마트 등 쇼핑 관련 통역사례가 많다. BBB 봉사자들은 24시간 봉사 대기모드에 있기 때문에 밤늦은 시간 119 구급대와 경찰서에 요청하는 긴급상황에도 대처한다. 갑작스러운 사고나 질병으로 119에 도움을 청한 외국인과 구급대 간 언어소통을 통해 환자를 위험에서 건지기도 하고 범죄를 저지르거나 당한 외국인과의 통역을 통해 조사를 돕기도 한다.

산부인과에서 중국인 산모와 남편의 통역을 도왔던 중국어 봉사자 정현희(27·경기 김포시)씨는 “한 생명이 태어나는 현장을 통역하게 되다니, 산모의 고통과 가족들의 걱정, 설렘이 느껴져 저까지 너무 긴장된 순간이었다”면서 “진통으로 괴로워하는 중국인 산모에게 남편의 말을 전해주면서, 저의 응원도 함께 전해줬는데 정말 즐겁고 행복했다”고 말했다.

BBB는 지난 9일 여수세계박람회 조직위원회와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5월12일부터 세 달간 진행되는 박람회 행사동안 외국인의 언어소통을 도와 성공적 박람회 개최를 지원할 예정이다. 앞서 2005년에는 경찰청과 업무협약을 맺고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지원했고, G20 정상회의 때는 회담이 열리는 강남구와 업무협약을 맺고 G20의 성공적 개최를 지원하기도 했다.

BBB는 이런 내·외국인 간 언어장벽을 허물어 관광통역 인프라로 활용되고 외국인들에게 친절한 이미지를 심어 줘 국격 향상에도 기여하고 있다. 이에 따라 BBB코리아는 지난해 11월 아산복지재단(이사장 정몽준)이 수여하는 제 23회 아산상 재능나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음성원기자 esw@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