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광장>착한 게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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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소설가

친구의 가혹한 괴롭힘을 견디다 못한 어린 학생이 생을 포기해버렸다. 아이가 이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보낸 외롭고도 고통스러웠던 순간이 찍힌 CCTV의 캡처 화면을 보았다. 엘리베이터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먹먹해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힘없이 수그린 뒤통수에서 아이가 겪었을 가혹한 아픔이 생생히 전해져왔고, 이런 세상을 만들어놓은 어른임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그날 저녁 식탁에서, 큰아이가 고등학생 시절에 당했던 폭력을 담담히 고백했다….

쉬는 시간이면 불러내서 담배 한 갑을 주면서 3분 안에 다 피우라고 했어요. 다 못피우면 남은 개수만큼 때려요. 손목시계와 저를 번갈아 쳐다보던 그 눈빛이 아직도 기억나요. 게임방 비용을 가져오라, 새 신발을 사오라 했고, 아파트 경비실 앞에서 기다리며 돈을 가지고 내려오라고 한 적도 있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왜 그때 얘기하지 않았니? 얘기해봤던들 뭐가 달라지겠어요. 왜 너였는데? 그건 모르죠.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며 국을 떠먹는 걸 보니 제 말대로 다 극복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과거형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현재형으로 바뀌는 걸 보면 평생토록 못잊을 상처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래 전 이야기지만 분노가 폭발했다. 그놈 전화번호 알아서 엄마한테 알려줘 봐. 알람 맞춰놓고 날마다 새벽 3 시에 전화해서 괴롭혀줄거야. 꼭 그만큼 갚아줄게. 아들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한때는 그런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다 흘려보냈어요.

혼자 그 시간을 견뎌냈을 아이에 대한 안쓰러움과 그런 형편을 짐작조차 못한 나 자신에 대한 뒤늦은 자책으로 속을 끓였다. 내 마음이 이럴진대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버린 아이들의 부모 심정은 어떻겠는가.

밤에 둘째 방에 갔더니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었다. 화면에는 무표정한 남자가 다연발총을 어깨에 둘러메고 극사실의 공간을 거침없이 걸어가며 마주치는 사람에게 주저없이 총을 발사하고 있었다. 쓰러진 사람들을 지나치며 그는 계속 사냥감을 찾아 달렸다. 잠시 보고 있는데도 너무도 끔찍하고 괴로웠다. 게임 속에서 피는 생명의 신성한 근원이 아니라 더러운 배설물처럼 보였다. 평소에 잔소리하는 성격이 아닌데 얘기가 길어졌다.

얘야, 게임을 해도 이런 건 하지 말아라. 너도 모르게 영혼이 파괴되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진다. 자신 때문에 친구가 자살했는데도 멀쩡할 만큼 영혼이 황폐해진 데는 이런 게임의 책임이 없지 않다고 봐….

둘째는 얼굴을 찌푸리며 이런 내 얘기를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사회적 현상의 원인을 하나로 몰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일견 무관해 보이는 몇 가지 원인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며 악순환을 거듭하게 된다는 걸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모든 레벨을 끝내면 3만3000명을 살해할 수 있다는 어떤 게임을 즐기다보면 심성이 차츰 파괴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시대착오적인 사람인 걸까.

청소년들의 영혼은 말랑거린다. 쉽게 물들고 영향받는다. 친구의 죽음이 게임 속 캐릭터의 죽음과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인생도 게임처럼 리셋 버튼을 누르면 돌이킬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최근에 우리나라 굴지의 어느 게임 소프트웨어 제조 회사가 지분을 처분하며 쥐게 된 거액의 투자처에 대한 추측 기사를 읽었다. 언젠가는 그 회사가 구단을 인수한다는 얘기도 있었다.

문득 이런 상상을 해본다. 경쟁과 입시에 찌든 가여운 아이들, 우리의 미래인 청소년들을 위해 그 일부를 투자해볼 계획은 없을까. 책임과 인과관계 같은 것 따지지 말고. 그토록 놀라운 게임을 만들 수 있는 두뇌집단이라면 청소년 복지사업에 대한 과감하고 창조적인 아이디어들도 무궁무진하게 나올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둔한 내 머리로는 기껏 아이들의 폭력적 에너지를 땀으로 발산할 수 있는 스포츠센터의 설립이나 공연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어줄 수 있는 열린 무대의 운영 정도지만. 그 프로젝트명으로는, ‘우리 이런 게임도 만들어요!’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