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석원의 서울 戀歌>남산순환도로엔 아베크족도 깡패도 참 많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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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을 건너고 있다. 남산을 가기 위해서다. 반포대교를 지나자마자 이태원 미군 부대 담장이 보인다. 누구에게나 ‘처음’의 의미는 각별하다. 첫 취학, 첫 직장, 첫사랑…. 나는 1980년 광주항쟁으로 휴교 중에 이곳 미군 부대 안에서 처음으로 내가 그린 그림을 팔았다. 모교인 대광고의 동창회장 사모님이 영내에서 미군 장교 부인에게 영어회화를 배우고 있었다. 당시엔 그런 일이 꽤 있었나 보다. 미군 부대 안은 서울에서도 특별한 곳이었다. 선택받은 자들을 위한 공간 같았다. 미군 부대 출입증을 과시용으로 부착한 자가용도 꽤 보았다. 어쨌든 동창회장 사모님 덕택에 미군 부부에게 수묵산수화 한 점을 4만 원에 팔았다. 작은 족자 크기였다. 그때의 4만 원은 아마 지금보단 열 배 이상의 값어치가 있었을 것 같은 큰돈이었다. 부인이 남편의 생일선물로 산 것이다. 그림을 받은 미군 장교 부부는 내 앞에서 서로에게 키스를 했다. 돈을 받고 부대를 걸어 나오는데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내 몸의 중력이 느껴지질 않았다. ‘내가 그린 그림이 팔리다니!’

남산 언저리 남대문시장 안엔 갈치골목이 있다. ‘희락’을 비롯한 갈치조림 전문식당들이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칼칼한 갈치조림과 탐스러운 계란찜을 번개 같은 속도로 조리해 내놓는다. 갈치골목 끝집인 ‘닭진미(구 강원집)’라는 닭곰탕집이 내 단골집이다. 신세계백화점 앞의 고층 건물 사이에 위태롭게 끼어 있는 순댓국집인 ‘철산집’과 갈치골목 근처 2층의 ‘막내횟집’과 더불어 내가 꼽는 남대문시장의 3대 맛집이다. 요즘은 7000원 하는 닭곰탕을 먹기 위해 일부러 자주 이곳을 찾는다. 오늘도 새벽에 눈뜨자마자 먹고 싶어 달려왔다. 일하는 할머님들이 둘러앉아 막 삶은 닭백숙을 손으로 죽죽 뜯고 있었다. 대부분 이 집에서 청춘을 보내신 분들이다. 바르르 윤이 나는 게 참 맛있어 보인다. 갈기갈기 찢어진 살점들이 여인네 속살마냥 뽀얗다.

지금은 아침 7시. 이른 아침인데 중년 남자 셋이서 닭곰탕에 소주를 마신다. 나도 먹고 싶다. 고문이다. 못 견디겠다. ‘많으면 남기지’ 하며 소주 한 병을 호기롭게 시켰다. 그런데 결국 다 마셔 버렸고…. 소주를 남긴다면 닭진미집 닭곰탕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오늘 하루는 시작부터 조짐이 이상하다. 가게 밖에서 생후 열두 달 된 생닭들을 씻고 있다. 주인 할머니는 남편이 상이군인. 양키 물건을 팔았으나 하도 단속이 심해 때려 치우고 남이 10년간 하던 이 식당을 인수받아 시작한 지도 50년. 합이 60년 된 이 식당의 주인 할머니는 성격이 불같은 욕쟁이 할머니다. 그만큼 거친 시장통에서도 살아남을 만큼 강인했던 거고. 그렇지만 속내는 깊고 자상하시다. 그러니 종업원들이 들어오면 안 나가고 버티고들 있지. 표현하기 어려운 이 집의 묘한 닭국물 맛은 가히 문화재급.

언젠가 내가 죽을 때, 아마 사는 동안 먹었던 이번 생애의 맛있었던 음식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갈 것 같은데 그중의 한 컷으로 장식될 만한 베스트 한국의 맛이다. 문득 생각날 때마다 내 생애 최고의 음식점과 술집 목록을 작성하고 또 수정하고 있다. 유언처럼….

지금은 보기 힘들지만 전엔 남대문시장 안에서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도 꽤 팔았다. 아현동 화실에서 자취를 하며 대학생활을 보내던 나는 남대문시장의 동물가게에 있는 작고 예쁜 암컷 새끼고양이 한 마리를 샀다. 노란색이었다. 혼자 지내는 자취생활이 외로워 쥐를 길렀다. 그런데 예상보다 훨씬 많은 동네 쥐들이 떼로 몰리는 바람에 쫓겨날 지경에 이르렀다. 쟁반에 쌀을 담아 쥐들을 꼬이게 한 것이 화근이었다. 책상 서랍마다 쥐들이 들어가 살고 있고 잘 때면 내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들고 높은 곳에서 내 배 위로 떨어지며 놀질 않나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고양이. 천년 만년 같이 살자고 이름을 ‘천순이’라고 지었다. 그런데 술 취해 자던 나는 그만 잠결에 천순이를 내 등짝으로 깔아 죽이고 말았다. 기른 지 고작 사흘 만이었다. 얼마나 미안한지. 이미 소용이 없었다. 박카스통을 먹물로 까맣게 칠하곤 죽은 천순이를 한지로 정성껏 싸서 그 안에 넣어 연세대 뒷산 봉원사 근처 양지 바른 곳에 묻었다. 그러고는 고등학생 시절 성악가 지망생인 짝에게 배운 슈베르트의 ‘안젤모의 무덤에서’란 장송곡을 불러 주었다. 원어인 독일어로 불렀다. 미안하다, 천순아!

남산은 서울역 건너 양동과 후암동 쪽으로도 이어져 있다. 나는 1979년 재수를 하면서 실업 과목을 상업에서 농업으로 바꿨다. 동물을 좋아해서다. 내심 농업을 전략 과목으로 삼았다. 그해 초 종로에서 서울역 건너로 이전한 대일학원에서 난 홍일선이란 시골스러운 외모의 선생님께 농업 과목을 새벽에 수강했다. 그때 배운 가축의 임신기간이 지금도 생각난다. 토끼는 30일, 염소 151일, 소 280일, 말 350일…. 지난 33년 동안 틈나는 대로 되뇌인 덕에 잊지 않고 있다. 가능하면 평생 기억하고 싶다. 플리머드록이란 회색줄무늬닭은 병해에 강하고 1년에 280개쯤의 산란을 하며 레그호온이란 흰색닭은 그보다 많은 330개가량의 알을 낳는다. 거세를 뜻하는 돼지 불까기는 고환 밑동에서 3㎝쯤을 남기고 명주실로 칭칭 감는다. 며칠 후 고환이 썩어 저절로 떨어지면 소독약으로 잘 소독해 마무리한다는 등등.

그러나 완벽한 가축에 관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내 예비고사 농업 성적은 망했다. 농업엔 가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논농사, 밭농사, 과일농사…. 도시 출신인 나는 뭐가 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나의 실수였다. 그래서 받은 예비고사 성적이 340점 만점에 209점. 고등학교 때보단 10점이 올랐으나 그해 서울미대 회화과의 최저 합격점인 210점엔 1점이 모자라 불합격됐다는 후문이 있었다. 실기는 수석이었다고 한다. 미술학원 원장님이 심사교수로부터 들었다며 전해 주셨다. 심사교수가 원장님 후배였다. 교수들도 아쉬워했다고 하던데. 농업에서 1점만 더 맞았어도 내 팔자가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불합격되길 정말 다행이다. 안하무인에다가 그렇고 그런 사이비 선생이나 돼있을 게 뻔하다.

서울역 건너 대일학원 가는 새벽길엔 양동 집창촌 펨푸 아줌마들의 호객행위가 극성이었다. 특히 서울역 앞 지하도가 심했다. 재수생인 나는 아침마다 귀찮고 민망했다. 대우빌딩 뒤에는 여관 간판을 내걸었으나 실제로는 성매매 윤락업소인 곳이 많았다. 청량리588, 미아리 텍사스, 천호동 텍사스, 용산역 앞과 더불어 서울의 대표적인 사창가였다. 숙박업소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윤락업소인 곳은 회현동 렉스호텔 뒤편의 여관촌들도 그랬다고 한다. 지금은 변태영업을 하는 여관이 서울에선 사라진 것 같다고 하던데 정확한 사실은 알 길이 없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만. 양동 집창촌엔 ‘염쟁이’라는 무서운 이들이 있었다. 염쟁이는 원래 이승을 정리하고 저승을 준비해 주는 역할. 죽은 사람의 몸을 씻기고 수의를 입히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보내주는 것이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목욕을, 저승에서의 첫 번째 목욕을 시켜주는 고귀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양동 집창촌의 염쟁이들은 그런 신성한 의식을 이상한 쪽으로 흉내내고 변질시켰다. 갓 상경한 시골 처녀를 강제로 성폭행해 과거의 순수한 자신을 잊게 하고 완전히 다른 세상인 윤락여성으로 전환시키는 악랄한 존재들이었다. 이름은 선량한 염쟁이였지만 실은 악마였다.

명동에서 남산으로 올라가다 보면 드라마센터가 있다. 1980년 끝 무렵, ‘배비장전’이란 마당극 초대권을 얻는 바람에 드라마센터에서 처음으로 국악을 접할 수 있었다. 1980년대엔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때였다.

1990년대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으킨 세계화 바람에 애꿎은 전통문화는 급속히 쇠락했다. 내가 본 ‘배비장전’ 공연은 현재는 해체된 걸로 알고 있는 명성그룹이란 회사에서 주관했다. 공연이 끝나자 회사 관계자들이 포장에 싸인 작고 두툼한 뭉치를 퇴장하는 관객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는 게 아닌가. 공연도 공짜로 봤는데 선물까지 받다니. 그저 미안하고 황송했다. 나는 그것이 간식용 빵이라고 생각해 집에 가서 자랑하고 싶었고 나눠 먹고 싶었다. 밖을 나가 보니 예보에 없던 겨울비가 억수로 내리고 있었다. 우산도 없었고 우산을 살 만한 곳도 없어 도리없이 명동까지 찬비를 다 맞고 내려가 버스를 탔다. 홀딱 젖은 생쥐 몰골로 불광동 집에 도착해서 선물을 펼쳐 보니 이럴 수가, 그것은 우비였다. 우비를 그렇게 작게 포장해서 주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간이우산은 대나무살에 얇고 파란 비닐을 실로 꿰맨 것이었고 우비는 농부나 군인들 혹은 등산가들만 입는 거창한 코트같이 생긴 옷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1974년 광복절날 문세광의 박정희 대통령 암살 기도 사건으로 육영수 여사가 피살된 남산 국립극장은 사건 전해인 1973년에 완공됐다. 사춘기의 지적욕구 때문인지 아니면 겉멋에 들어서인지 고전음악엔 문외한이었던 중학생의 나는 국립교향악단의 연주회를 6개월간이나 정기권을 끊어 빠짐없이 남산 국립극장에 가서 관람한 경험이 있다. 당시 지휘자는 홍연택이란 분이었고 작은 망원경을 준비해 열심히 연주와 지휘하는 모습을 관찰했었다. 그 덕인지 지금도 틈만 나면 고전음악의 향기에 푹 빠져 지내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중학생 시절 한때의 치기가 평생 내 인생에 좋은 친구를 만들어 준 셈이다.

또 그 시절엔 친구들과 남산순환도로에서 자전거 타기를 즐겼었다. 그런데 친구들은 남산의 깡패들에게 봉변을 당한 적도 있었다. 남산에서는 아베크족을 괴롭히는 건달들이 많았고 박카스 아줌마, 돗자리 아줌마라 불리는 이상한 아주머니들도 나타나 아저씨들을 상대로 남산의 노천에서 윤락행위를 했다던데 실제로 현장을 목격한 적은 없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에 남산 어린이회관이 준공됐다. 마치 우주선 같은 특이한 모습에다 흰색의 산뜻한 외관, 그리고 둥근 모양의 맨 꼭대기 층엔 회전식 식당도 갖춘 멋진 건물이었다. 그 회전식 식당에서 부모님과 함께 ‘양식’이라는 음식을 난생 처음 먹어 봤다. 오므라이스였는데 후추를 뿌린다는 것이 후추병의 뚜껑이 열리며 쏟아지는 바람에 내 오므라이스는 후추라이스가 됐고 엄마가 대신 드셨다. 학교에서 단체로 어린이회관을 간 적도 있었다. 특히 과학전시관이 재밌었다. 전자피아노란 신기한 악기를 소개해 주시는 선생님이 우리가 신청하는 모든 곡을 악보도 없이 연주하셔서 깜짝 놀란 우리는 환호하며 열심히 박수로 화답했었다.

개관 기념 미술대회도 있었다. 미리 배포한 전지 크기의 큰 종이에다 글과 그림 등 모든 기법을 사용해 자유롭게 집에서 한 달간 작업하여 제출하는 방식이었다. 나는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란 주제로 작품을 했다. 한 달간 열심히 제작해 완성해서 마루에 펼쳐 놓았는데 우리 집 잡종 강아지가 그 위에 오줌을 쌌다. 그 자리는 누렇게 얼룩이 지고. 난 요즘 표현으로 완전 멘털 붕괴 상황에 이르렀다. 우리 집 식모 순덕이 누나가 그 부분을 오려 내고 다른 종이로 땜빵을 해서 겨우 제출할 수는 있었지만 이미 그림은 누더기처럼 볼품없었다. 결과는 전국 3등. 식구들은 강아지 방뇨 사건만 없었다면 1등이었을 텐데 하며 많이들 아쉬워했다. 담임인 예쁜 이미희 선생님도 못내 아쉬워하셨다. 남산 어린이회관에서 시상식을 하고 메달을 목에 건 채 아버지와 회관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을 지금도 가끔 본다. 그때 메달을 목에 건 채 남대문까지 걸어 내려와 버스 타고 홍제동 집에 도착한 후 가족들과 엄마의 양장점 누나들께 보여주고 나서야 메달을 벗었다. 오글오글거리는 기억이지만 그것마저도 행복한 추억이 되었다.

지금은 용도는 바뀌었으나 여전히 어린이회관 흰색 건물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남산에 있다. 내 어린 시절로 날 데려다 주는 타임머신 같은 모습을 한 채 빙그레 웃고 서 있다. 마치 내게 “옛날 어느 때로 모셔 드릴까요”하며 말을 건넬 것 같다.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