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석원의 서울 戀歌>유일하게 뽀뽀 허용됐던 공공장소 으슥한 벤치마다 남녀 껴안고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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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케이블카를 지금껏 세 번 탔다. 1967년 초등학교에 막 입학해서 탄 것이 처음이었다. 사람들을 잔뜩 태운 큰 쇳덩어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게 신기했다. 남산 기슭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건물들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렇지만 내 눈길은 ‘리라초등학교’에 고정됐다. 노란 색깔이 확 띄었다. 시설이 최고급인 신설 사립학교라 호기심과 부러움도 들었다. 나는 동네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그런데 실은 그 당시 우리 집은 상당한 부자였다. 집이 4층이었는데 지을 당시엔 성동구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고 한다. 형편이 안돼서 못 간 게 아니었다. 서울 사대부초에 지원했지만 떨어져 어쩔 수 없이 집 근처의 광희초등학교에 입학했었다. 막상 들어가서 보니 오랜 역사에 아담한 동물원도 있어 꽤나 괜찮았다.

두 번째는 결혼하고 나서다. 날씨 좋은 날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쟁반만 한 남산돈까스도 맛있게 먹고 기분 좋게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다. 올라가서 서울을 내려다봤다. 참으로 집들이 많았다. 그런데 저렇게 많은 집들 중에서 내 집이 없다는 게 조금은 한심하고 착잡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때는 우리 집 형편이 안 좋았다. 지금은 나도 집이 있다.

2012년 9월8일 토요일 초저녁, 나는 세 번째로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을 올라왔다. 남산 팔각정 앞에서 사물놀이도 하고 무술시범도 보여준다. 전통 문화공연이다. 진짜 칼로 볏단과 대나무를 자른다. 안 잘릴까봐 걱정된다. 대여섯 명이 시범을 보이는데 아니나 다를까 두 번째 사람의 대나무가 안 잘렸다. 또 한 사람은 자신의 창을 놓치는 실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모두들 진지했고 볼 만한 공연이었다. 박수를 많이 쳤다. 수고들 했다고.

N타워광장. 사람도 많다. 태반이 관광객들. 주로 중국인들이고 동남아시아나 일본인들이 섞여 있다. 배 나온 사람, 홀쭉한 사람, 웃는 사람, 피곤한 사람들이 서로 뒤엉켜 사진 찍기에 열중이다. 그들은 모습도 국적도 제각각이지만 모두가 하나같이 눈은 두 개요, 귀도 두 개요, 코는 하나고, 입도 하나다. 또 보이진 않지만 저마다 하나씩의 항문을 갖고 있을 것이다. 사람 수만큼의 항문들이 N타워광장에서 왔다 갔다 한다고 생각하니 우습다.

예전엔 연인들이 남산에 뽀뽀하러 왔다. 서울에서 거의 유일하게 뽀뽀가 허용된 공공장소였다. 으슥한 벤치마다엔 약속이나 한 듯이 남녀가 껴안고 있었고 그런 연인들을 괴롭히는 ‘양아치’들도 적지 않았다. 지금은 벤치들을 관광객들이 차지하고 있다. 연인들이 매단 자물쇠나무들이 이채롭다. 사랑의 자물쇠란다. 서로들 사랑의 언약을 하고 증표로 남긴다며 자물쇠를 채운 후 열쇠는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버렸다. 꼭 저렇게 다짐을 해야 할까. 다 부질없는 짓인데….

내가 ‘양식’을 처음 먹어 봤던 남산 어린이회관의 식당도 회전식이었는데 남산N타워 레스토랑도 바닥이 360도 회전하며 조금씩 돌아간다. N타워 5층 회전식 레스토랑에서 바라본 서울풍경은 감동적이었다. 오후까지 날씨가 흐렸다. 그래서 혹 비가 올까 걱정도 했다. 그런데 오히려 갑자기 하늘이 확 개면서 짙고 푸른 하늘이 나타나고 연이어 붉은 선홍색 노을빛이 드리우며 청보라색 구름 사이로 장엄한 일몰을 연출하는 게 아닌가. 오늘 만약 하루 종일 날씨가 좋았다면 황혼의 풍경이 지금처럼 다채롭지는 못한 채 그저 밋밋했을 것 같다. 인생도 그런 것 같고.

굴곡지고 비틀어졌어도 때론 그것이 더 아름답다. ‘잘 될 거야’하고 스스로 되뇌며 살아온 삶들이 꿈결 같다. 지금은 전에 왔었을 때처럼 부러움과 결핍에 아쉬워하지 않는다. 그저 이 순간을 감사한다. 사는 게 지루하다면, 삶이 피곤하다면, 인생이 억울하다면, 남산타워 회전하는 레스토랑에서 사랑하는 이와 함께 붉고 푸른 노을을 바라보라. 세상이 이렇게도 아름다운 곳이었던가 하고 화들짝 놀랄 것이다. 새삼스럽게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낼 것이다.

남산코끼리 동국대학교. 그리고 애증과 상실. 그곳서 보낸 내 젊음은 떨림이고, 상처고, 명예고, 자존심이다. 동국대 입학 직후 철학개론 첫 시간, 김용정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땅에 불교가 전파된 지 1500년. 그 유장한 역사가 한국의 문화사이며, 철학의 역사고, 우리가 살아온, 살아갈 이유가 담겨있는 물줄기입니다. 그리고 그 물줄기가 거대한 호수같이 모여 있는 곳이 여기 동국대학교입니다.” 우리는 학창시절 내내 만해 한용운이며 양주동 박사나 미당 서정주 시인과 함께했다. 문학과 철학 같은 인문학은 남산 기슭 동국대를 에워싸고 있는 공기 같은 존재였다. 4년 동안 그 공기를 실컷 마실 수 있었다.

전교에서 우리 과가 가장 여학생이 많았다. 그래서 미술학과엔 놀러 온 야구부 선수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여학생들이 응원부에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김성한, 한대화, 민문식…. 그들은 야구만 잘한 게 아니라 사람도 좋았다. 지금은 모두가 중견의 야구인이 됐으니 세월이 그만큼 많이 변한 것이다.

동국대 출신 연예인은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80년 봄은 매일 데모의 연속이었다. 중문 앞 앰베서더호텔 근처는 늘 최루탄 연기로 자욱했다. 그런데 최루탄 연기에 콜록이며 정신없이 시위를 하고 있는데 우리 과 건물 현관 기둥에 기대선 채 지긋이 그 장면을 보고 있는 긴 머리칼의 여인이 눈에 유독 띄었다. ‘겨울여자’의 여배우 장미희였다. 그녀는 우리 과와 같은 강의동에서 수강했고 아마 시위 때문에 못 들어오고 있는 자신의 자가용을 기다리는 듯 보였다. 화면보다 훨씬 우아한 모습이었다.

앰베서더호텔 건너엔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적산가옥이 몇 채 있었다. 강경시위 때마다 그곳은 쑥밭이 되어 우리들도 참으로 미안했다. 화염병과 돌 투척은 기본이었다. 졸업한 후 몇 해가 지나서 보니 적산가옥들은 말끔히 철거돼 있고 그 자리엔 초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녹슨 철판 같은 재료로 뒤덮여져 있는 승효상 선생 설계의 건물이었다. 지금은 그 건물을 흉내 내서 많이들 짓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충격적이었다. 녹슨 철판을 쓰다니. 우리 건축사에 남을 명작이다. 우리나라 광고인들의 사관학교라 불리는 광고회사인 웰컴이 건물주였다. 회사대표 역시 대단한 안목과 용기를 가졌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웰컴시티 옆으론 ‘전원’이란 아담한 2층의 한정식집이 있다. 이곳은 경남 진주나 하동 쪽의 정갈한 음식으로 유명하며 2층의 운치 있는 분위기에 단골손님이 많다. 얼마 전 돌아가신 이만익 화백이 특히 사랑하셨다.

호텔 옆으론 5가 홍탁집이 있었고 우리 과 회식은 그곳에서 많이 했다. 현재는 퇴계로 애견센터 뒷골목으로 이전했다. 초장 맛이 일품이었다. 사장님은 자신의 의자 뒤에 초장항아리를 감춰놓 듯 은밀히 두시며 애지중지하셨다. 보물단지처럼.

대한극장 뒤편에는 내가 졸개로 있는 ‘낭만무리’의 소굴이 있다. 저명한 사진작가인 이명조 사장이 두령이고 그의 회사 토픽은 우리 무리의 소굴이다. 우리 소굴의 옥상에서 음주하며 바라보는 남산의 야경은 기가 막히다. 우두머리 이두령의 한결같은 겸손함과 낭만적인 생활태도와 배려심은 늘 나를 반성하게 한다. 막걸리를 좋아하지만 술이 그렇게 세지 않아 더욱 이두령을 좋아하게 된다. 난 나보다 술이 센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남산한옥마을도 그 옆으로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그곳을 찾는 관광객이 많은 것에 놀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아쉬움도 있다. 입구에 명품거리가 형성되면 국익에 더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란 생각 때문이다. 그곳엔 오래전부터 주유소와 허름한 가게들이 남루한 모습으로 서 있다.

CJ인재원도 한옥마을과 이웃해 있다. 연수원과 회장접견실이 있고 이사회도 그곳에서 열린다. 사실 나는 CJ나눔재단의 사외이사로 4년째 이름을 달고 있다. 그런데 4년간이나 같은 이사로 봉직하고 있는 일곱 분 중에 안철수 씨나 나경원 씨가 요즘 굉장한 유명인사라는 것이 재밌기도 하다. 내 주변에 그런 유명인들이 있다니.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장충단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 청계천이 복개될 때 공원으로 이전한 수표교 밑에는 개울물이 흘렀고 신기한 소금쟁이들이 물 위에 떠있었다.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고 색안경을 낀 채 절규하듯 ‘안개낀 장충단공원’을 배호가 부르기 전에도 장충단공원은 유명했다. 반박자 느린 마초적인 슬픔의 미학을 보여 주었던 배호는 29세라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신장염 때문이었다. 본명이 배만금이며 1942년 중국 산둥(山東)성에서 태어나 ‘돌아가는 삼각지’ ‘누가울어’ ‘안개속으로 가버린 사랑’ ‘배신자’ ‘굿바이’ ‘마지막 잎새’ 등의 주옥같은 노래들을 남기고 1971년 미혼으로 타계했다. 시대착오적이지만 자기 혁신적인 불세출의 가객이 사라진 것이다.

장충단공원은 노인들의 영토였다. 차력사, 개싸움, 뱀장수, 그리고 팔자 타령하며 술 취해 늘어진 과부 아주머니, 문둥이라 불린 무서운 한센병 걸인도 있었고, 술 취해 쓰러져 있던 아줌마를 걸인이 욕보였고 그 아줌마는 자살하고 말았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었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막 나왔을 때쯤의 얘기다. 노인들의 흰색 한복이 넘실대던 곳이 내 어릴 적 본 장충단공원의 풍경이었다. 도롱뇽의 알을 항아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며 파는 아줌마, 냉차수레, 리어카주점들도 널렸었다. 옷핀에 꽂아 해삼을 처음 먹어본 곳도 장충단공원에서였다. 그런 장충단공원이 지금은 너무도 조용한 정원으로 변했다. 공터에 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일 장소가 없어졌다.

66전 전승의 전설적 세계챔피언 벤베누티를 가난한 유복자 김기수가 기적같이 이긴 곳은 장충체육관이었다. 전 국민이 환호한 박치기왕 김일, 스타킹 신은 곱슬머리 천규덕, 허버트강과 김현의 라이벌전, 유제두, 박찬희, 연고전, 그리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대통령 선출 등도 지금은 개축 중인 남산기슭의 장충체육관에서 이뤄졌다. 설계나 시공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했지만 당시 우리보다 선진국이었고 기술력이 앞선 필리핀의 기술자들이 거들었다는 설도 있다. 그때 필리핀의 국민소득이 우리보다 세 배가 넘었다고 한다. 지금은 우리의 1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으니 새삼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1946년 개업한 원조제과점 태극당의 모나카와 버터빵, 단팥빵 맛은 지금도 어릴 적 맛본 그대로다.

레슬링 경기가 끝나면 막 시합을 치른 선수들조차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와서 먹던 48년 역사의 원조 족발집인 평안도집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맛있다. 실은 난 평안도집 족발에 중독된지 오래다. 이경순 사장님은 지금도 여전히 카운터를 지키고 계신다. 78세란 연세에 남산 스포츠센터에서 매일 테니스를 치신다니 놀랍다. 큰집의 예쁜 두 조카 며느님들이 합세하여 요즘 더욱 번창하고 있어 흐뭇하다. 너무 이른 시간에 족발이 떨어져 못 먹을까 겁난다. 갈 때마다 마음이 급하다.

원조 부잣집인 이병철 회장 저택과 원조 약국인 수정약국 등 남산골 언저리엔 원조명물들이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참으로 고마울 뿐이다. 추억이 담긴 모습들이 사라진다면 쓸쓸함은 당연할 거고.

세월과 함께 사라진 남산의 명물도 있다. 나막신 신고 뼈대만 엉성한 호리호리한 체격에 가슴을 뻐기고 눈을 내리깔아 코끝만 보고 걸어가는 남산골 샌님, 이희승의 수필에 등장하는 딸깍발이는 안 보인다. 느럭느럭 갈지자걸음으로 남산골을 휘젓고 다니는 샌님들이 어험하며 헛기침하며 나타나야 제격일 것 같은데. 그 많았다던 샌님들도 지금은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가야만 만날 수 있게 됐다. 이곳 남산에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서울 사람들의 앞산 남산이 앞으로는 또 어떻게 변할지 참으로 궁금하다. 동국대 출신 개그맨 고 김형곤씨의 유행어 ‘잘∼ 돼야 될 텐데’가 떠올랐다. 그의 또 다른 유행어 ‘잘 될 턱이 있나’가 아니라, 분명코 잘 돼야 된다. 그만큼 남산은 우리에게 소중한 보물산이기에 말이다.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