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석원의 서울 戀歌>중학생때 수업 빼먹고 들어간 파고다극장 옆자리 낯선 신사 손이 내 허벅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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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0월 하순의 늦은 밤. 인사동 네거리에서 택시를 잡고 있었다. 빈 택시는 어려울 것같고 합승택시라도 잡으려고 “장안동, 장안동” 하며 열심히 외쳐댔다. 나는 대학을 마치고 장안동의 9평반짜리 시영아파트에서 매달 9만 원씩 내는 월세를 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택시를 기다리고 서있는데 저만치에서 택시를 잡던 여인 두 명이 내게 다가오는 것이다. 가까이서 보니 아주머니와 젊은 아가씨. 아주머니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장안동 가세요? 초면에 죄송하지만 이 아가씨도 장안동 가는데 같이 가 주시면 안 될까요? 아가씨만 보내야 되는데 여자 혼자 택시 타기가….”

젊은 아가씨는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어두컴컴했던 인사동 네거리가 훤히 밝아지는 것같았다. “아, 예 예 그러지요.” 마지못해 응하는 척 했지만 속으로는 ‘살다 보니 이런 횡재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 둘은 택시를 타고 장안동까지 갔다. 그 아가씨 역시 나와 같은 장안동 뚝방옆 시영아파트에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참 묘한 인연이다. 택시 안에서 몇마디 대화를 나누며 자세히 봤다. 모습뿐만 아니라 말투며 태도가 참으로 여성스러우면서 아름다웠다. 아마도 1984년 그해를 통틀어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미인이라 해도 좋을 듯 싶었다. 도착해서 몇 걸음 나란히 걸어가는데 택시비를 내주셨으니 자신이 술을 한잔 사겠노라고 그녀는 청을 한다. 왜 아니되겠느냐! 오늘은 참으로 운수대통한 날이다.

그 당시 장안동 시영아파트 주변엔 ‘오돌뼈’며 돼지곱창을 돌판에 구워 먹는 실내 포장마차가 많았다. 한 달 전 나는 이곳 장안동의 포장마차에서 연탄불에 안주를 굽고 있는 아낙네와 술 취한 주객을 소재로 그린 수묵담채화로 1984년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했었다. 그래서 받은 상금 800만 원으로 유학을 떠날 예정이었다. 그녀는 놀랍게도 낙원동에 있는 유명한 요정 ‘명월관’의 가수. 낙원동 명월관이나 오진암은 술꾼이라면 꼭 가보고 싶은 ‘화류계의 성지’ 같은 곳. 자신은 스탠더드 풍의 팝이나 가요를 주로 불렀지만 가수로서 이름을 날리진 못하고 줄곧 명월관에서 주객들을 상대로 노래를 하다가 오늘 그곳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도쿄 신주쿠에 있는 ‘유리’라는 주점의 가수로 취업이 되어 며칠 후엔 일본으로 떠나기 때문이란다.

그녀의 가수인생은 고달팠다. 애틋한 얘기들을 듣다 보니 술이 마냥 들어갔다. 그런데 그녀는 대단한 주당. 실내 포장마차의 소주를 둘이서 여섯일곱 병쯤은 마셨던 것같다. 그런데도 흔들림이 없다. 나만 죽게 생겼다. 마침 그녀도 한 달 전 나의 미술대전 수상 그림을 TV에서 봤었다고 한다. 생활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을 소재로 저런 그림을 그렸다는 것에 적지않게 감명받았다고 들뜬 목소리로 얘기해 주었다.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모든 상황은 좋았지만 이를 어쩌나 나의 주력(酒力)이 달린다. 이제 곧 동이 틀 텐데…. 큰일이다. 오늘 아침에는 엄격한 기독교 학교인 나의 모교 대광고등학교에 가서 전교생과 선생님들 그리고 고명하신 초빙 인사들을 모시고 그해의 ‘모교를 빛낸 동문상’을 받기로 예정돼 있었던 것이다. 존경하는 한경직 이사장님과 강신명 목사님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안타깝도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다가 할 수 없이 못내 아쉬운 작별을 했다. 그녀는 내게 당부했다. 신주쿠에 오시면 꼭 ‘유리’에 들러 달라고. 유명한 곳이기 때문에 찾기가 쉬울 거라며 몇번이나 당부했다. 그리고 그녀와 헤어졌다. 휘적휘적 아쉬운 발걸음으로 집에 갔다. 그날 모교에서의 엄숙한 행사는 내 몸에서 뿜어 나오는 술 냄새 때문에 참으로 송구스러웠고 곤혹스러웠다. 그로부터 얼마 후 거짓말같이 정말 나는 신주쿠에 갈 수 있었지만 일본어를 전혀 못하는 내가 그곳에서 ‘유리’란 술집을 찾는다는 것은 한강 백사장에서 잃어버린 반지 찾는 것처럼 어렵게 느껴졌다. 낙원동 ‘명월관의 여가수’, 좋았기도 하고 아쉬웠던 추억이었다.

2012년 가을, 그때를 회상하며 오래간만에 가본 낙원동. 명월관은 없어진 지 이미 오래고 지금 그 자리엔 한국사이버대학이 들어서 있었다. 또다른 유명 요정인 오진암도 3년 전 철거됐고 대형호텔을 신축 중이다. 그 요정 골목엔 아직 작은 요정이 남아 있었다. 요즘엔 가격이 어떻게 되냐고 요정의 직원에게 물어 봤더니 밴드 부르면 대략 1인당 35만 원 정도란다. 밴드라는 얘기에 다시 그때의 명월관 여가수가 생각났다.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으로 유명한 모더니즘 시인 박인환은 광복이 되자 다니던 평양의전을 그만두고 낙원동 입구에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열었다. 마리는 프랑스의 여류화가 마리 로랑생에서 따온 이름. 재스민이란 뜻도 있다. 그는 이 서점에서 만난 한 살 아래의 훤칠한 미인이었던 이정숙과 1948년 덕수궁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세종로 지금의 교보문고 뒤편에 있던 처가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술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던 시인 박인환은 시인 이상(李箱)의 기일(忌日)을 맞아 문우(文友)들과 내리 사흘을 술마시다 1956년 3월20일 31세의 나이로 별세한다. 심장마비였다.

홀로 남은 시인의 젊은 아내는 박인환이 즐겨 다니던 명동에서 험한 일을 해야 할 만큼 어렵게 살았다. 혼자 힘으로 2남1녀를 길러야만 했다. 누구도 손가락질할 수 없는 서글픈 인생이었다.

낙원동 악기상가는 참 묘한 곳이다. 낙원상가 2, 3층엔 꽉 들어찬 각종 악기들이 사람처럼 손님을 반기고 있었는데 악기를 전혀 못 다루는 나에게도 마치 ‘삐끼’처럼 호객행위를 하는 것같다. 그러니 진짜 음악인들은 어떨까. 몸이 뜨거워지고 이것 저것 탐나는 시선으로 만져보고 연주해 보고 싶을 게 뻔하다. 이렇게 한곳에 200개 이상의 악기상가만 밀접해서 있는 곳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단다. 악기상가 2층 복도를 지나는데 낯익은 남자가 드럼스틱을 들고 행복한 표정으로 지나간다. 러닝셔츠 차림의 그는 재즈드러머 류복성 선생. 71세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청년 같은 모습이다. 얼마 전 데뷔 55주년 콘서트를 갔었다. 그야말로 한국의 재즈대가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을 ‘재즈거지’라며 조소한다. 중·고등 학생시절 ‘벤허’ ‘십계’ 등을 단체상영했던 4층의 헐리우드극장은 아트시네마로 새로 탄생했다.

낙원상가 입구는 온통 돼지국밥 집들이다. 광주집, 전주집, 충청도집, 강원도집…. 이곳들 중 한 곳에서 난 1985년 여름에, 지금은 지하철 역장으로 있는 중학 동창 이천직과 머릿고기에, 소주를 마시며 TV 속 여가수에 흠뻑 빠졌던 기억이 있다. 바로 글래머 가수 김추자가 잠시 컴백한 것이다. 1969년 신중현 작곡의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등으로 데뷔한 춘천여고 응원단장 출신의 김추자는 등장하자마자 그 당시 가창력, 미모, 댄스의 삼박자를 갖춘 펄시스터즈조차 단박에 능가할 만큼 섹시가수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지만 1971년 12월의 이른바 ‘김추자 소주병 난자사건’으로 가요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엔 어찌나 그녀의 노래와 춤이 충격적이었는지 김추자가 사실은 간첩이고 그의 손짓이 암호라는 등 온갖 희한한 소문이 나기도 했던 그녀는 ‘님은 먼 곳에’ ‘거짓말이야’ ‘나뭇잎이 떨어져서’ 등의 불후의 명곡들을 남겼다. 오죽하면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말이 유행어로 돌았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인기 여가수였다.

낙원상가 앞 순댓국 집에서 여전히 풍만한 김추자에 흥분될 정도로 매료돼 진탕 술을 마신 덕으로 장염에 걸려 며칠 심하게 고생했었다.

중학생 시절 여름방학. 종로2가 경복학원에서 ‘기초영문법’을 수강하던 나는 수업을 빼먹고 대낮에 낙원동 파고다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관람객이 거의 없는 썰렁한 극장 안. 온통 널려있는 빈 자리를 놔두고 양복입은 아저씨가 하필 내 바로 옆자리에 앉는 것이다. 그것도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앉는다. 중학생인 내게 말이다. 그러고는 얼마 후 그 아저씨의 손이 내 허벅지 위로 슬그머니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기겁을 한 나는 얼른 일어나 다른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아저씨가 또 내 옆에 앉는다. 결국 바로 극장을 떠났다. 그곳은 동성연애자들이 많이 애용하던 극장이었다. 심야엔 갈 곳 없는 이들이 밤늦도록 영화를 보기도 했다. 나와는 동갑인 ‘입 속의 검은 잎’의 시인 기형도가 1989년 뇌졸중으로 새벽에 숨진 채 발견된 곳도 파고다극장. 그때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고 중앙일보 기자로 재직 중이었다. 술자리에서 기형도가 즐겨 부르던 ‘2인의 척후병’이란 노랫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지금 극장은 고시원과 식당, 마트, 노래주점으로 바뀌었다. 극장과 탑골공원 사이 길바닥엔 술취한 노인이 대자로 누워있다. 낙원동 골목마다엔 술취한 노인들이 유독 많았다. 그들은 몹시 쓸쓸하거나 아니면 무언가에 잔뜩 화가 난 듯 보였다.

1991년 인사동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하고 있는 중에 모택동 모자를 쓰고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큼직한 숄더백을 멘 요상한 모습의 스님이 찾아 왔다. 전시된 그림을 보고는 “이 그림을 내가 그렸다고 하면 대단했을 텐데” 하며 전시 내내 매일 들르시는 것이다.

스님은 낙원동 여관에서 기거한다고 했다. 대어(大魚), 그리고 알아볼 수 없는 한자에다 내 이름을 적은 자신의 두툼한 화집도 갖다 주셨다. 그분이 걸레스님으로 알려진 ‘중광’. 1935년 제주 출생인 중광스님은 27세 때 통도사에서 출가했지만 여러 가지 기행으로 파문을 당했다. 그는 열다섯 나이에 집에서 기르던 암탉한테 동정을 바쳤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그린 많은 동물들이 인간의 성기를 달고 있다. 자신의 성기에 붓을 매달고 그 붓에 먹을 묻혀 그림을 그리는 등 파격적 기행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그림은 얽매임이 없이 자유로웠다. 경계를 태연하게 넘나드는 경이로운 작품들이 많았다. 무아지경에서 일사천리로 그린 것 같았다. 그렇지만 제도권 미술계에선 중광의 작품을 저속하다며 평가절하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한다는 의심이 들었다.

중광은 2000년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이승에서의 마지막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제목은 ‘괜히 왔다 간다’였다. 그리고 2년 후 입적했다. ‘인연이 있어 괴롭고, 인연이 없어 괴롭고, 만나도 괴롭고, 헤어져도 괴로우니 인연이란 괴로움이 얽힌 그물인가?’ 스님이 기거했을 낙원동 여관촌을 지나며 생전 중광의 말을 곱씹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지하마트인 낙원시장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세상의 시름들이 세월따라 켜켜이 앉혀진 듯 무거운 분위기였다. 가슴이 답답해서 금방 나오고 말았다. 인사동 쪽으로 건너려고 떡집 앞 건널목에 서있다. 파란 신호등이 켜져 저편으로 건너가면 낙원을 떠난다. 낙원! 모든 이들의 파라다이스란 뜻이 오히려 냉소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비가 오려는 듯 하늘이 끄물거린다. 나도 오늘 이곳에 괜히 왔다 간다. 화가

내가 중이 되면 구름 바람도

걸림없이 살 줄 알았는데….

이제는 구름 바람이 다 가도

나는 나란 그물에 걸려

가지를 못하는구나.

땅과 하늘이 오입하다 들켜

짐보따리를 싼다.

걸레스님 중광 ‘허튼 소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