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소설 ‘BANK’>(248) 제4부 하늘 아래 으뜸 인간 : 제17장 열차 강도-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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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졌다. 내리막이 끝나고 평지를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덜커덕.

기차 바퀴가 철로에 부딪치는 소리가 둔탁했다. 기차가 다리 위로 올라섰다. 그 순간 철호가 고개를 돌려 현주와 눈을 맞췄다. 검은 눈동자가 위에서 아래로 향했다. 꼼짝 말고 얌전히 엎드려 있으라는 뜻이다. 어깨에 두른 가방을 벗어 던졌다. 진태가 얼떨결에 가방을 받자 철호가 달려들며 주먹으로 턱을 후려쳤다.

철호는 쓰러진 진태에게서 가방을 빼앗아 품에 안고 차창으로 올라섰다. 다리 아래로 뛰어내리려는 것이다. 바람이 턱에 붙은 가짜 수염을 뜯어낼 만큼 강했다.

“어딜!”

진태가 오른팔로 철호의 발목을 휘감았다. 철호가 다리를 휘저었지만 진태는 더 꼭 팔에 힘을 실었다.

“내려와 당장! 아니면 찍어버린다.”

진태의 오른손에 들린 도끼날이 번뜩였다.

“놔!”

철호가 무릎을 접어 가슴을 때리려고 했다. 진태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허벅지를 노리며 손도끼를 겨눴다.

“안 돼!”

그 순간 현주가 몸을 날려 철호의 다리를 감쌌다. 진태는 현주의 등을 찍지 못하고 망설였다.

“물러서!”

현주가 소리쳤다.

“철호 오빠! 어서 가. 어서! 윽!”

진태의 도끼 대신 북두칠성 땅꼬마의 단창이 현주의 옆구리를 깊숙하게 찔렀다. 새벽에 먼저 인천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숙소 문을 두드린 사내였다. 철호와 현주를 안심시키려는 혁필의 농간이었다.

명자의 손수건을 넣어둔 주머니에서부터, 수놓은 학의 머리에서부터 피가 흘러내렸다. 현주는 끝까지 철호의 다리를 감싸기 위해 버둥거렸다. 점점 몸이 흘러내렸다.

“안 돼.”

진태가 소리치며 도끼를 내려놓았다. 그 순간 철호가 몸을 비틀며 발을 뺐다. 신발이 벗겨졌고 머리와 어깨가 부서진 차창 밖으로 나갔다. 철호는 고개를 돌려 현주와 눈을 맞췄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여동생이 유언처럼 말했다.

“가!”

북두칠성 고래의 쇠몽둥이가 철호의 어깨를 부수기 직전, 철호는 허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강에 닿을 때까지, 철호는 가방을 안고 현주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늘 기차에 오른 현주, 어제 공연에서 노래를 부른 현주, 인천 부두 창고에서 만난 현주, 그리고 인향을 따라서 송도 시장 구경을 나섰던 어린 현주까지! 그리고 현주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현주가 부르던 타령에서부터 영어와 일어 노래들이 처음엔 하나하나 들리다가 그 모든 노래들이 뒤섞였다. 아름다웠다. 수많은 새들이 각기 저마다의 음색으로 노래하는 듯했다. 현주는 그 하나하나이자 그 모두였다.

수면에 닿기 직전 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현주의 마지막 말이 점점 크게 들려왔다.

가! 가! 가! 가!

철호는 가방을 오른팔로 품에 안은 채 떨어졌다. 수중으로 깊이 빠지는 순간에도 가방을 놓치지 않았다. 두 발을 힘껏 저어 수면으로 올라가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가방을 쥔 오른팔이 손에서부터 어깨까지 저려왔다. 창에 찔릴 때 다친 탓일까. 쥐가 내린 것이다. 왼팔로 가방을 옮겨 쥐는 순간, 오른 다리까지 쥐가 옮아갔다. 현주가 끝까지 덮고 버티던 바로 그 다리였다. 몸을 뒤챘지만 수면으로 올라가지 않고 자꾸 강물에 쓸려 내려갔다. 숨이 막혀왔다. 오른팔과 오른 다리가 움직이지 않자 같은 자리만 맴돌았다. 왼팔로 물살을 저어야 했지만, 철호는 가방을 포기할 수 없었다. 현주의 목숨과 바꾼 가방이었다. 다시 현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 가! 가방 따윈 버려. 오빤 꼭 살아야 해. 가!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