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소설 ‘BANK’>(249) 제5부 부국(富國)의 꿈, 중앙은행 : 서장 단독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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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약속이다. 이자든 시간이든 약속을 깨는 이와는 거래하지 말라.

왕대인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은 ‘BANK 4’를 받고 일주일 뒤였다. 그동안 백방으로 장철호와 왕대인, 마리아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찾지 못했다. 국외로 빠져나간 것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어딥니까 대체?”

수화기를 타고 바흐의 무반주 첼로 독주곡 1번이 흘러나왔다. 대답은 않고 수화기를 전축 앰프에 갖다 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 장철호, 자네 할아버지의 인생은 이 첼로 독주곡과도 같아. 반주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직하게 한 길을 걸은 게지. 화음이다, 합창이나 협연이다 하며 기대고 빌붙어 살아온 인생은 단독자의 삶을 논할 자격이 없어.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병신들!”

왕대인은 짜증 섞인 분노를 토했다. 내가 따지고 들면 전화를 끊을 기세였다.

“같이 있는 겁니까?”

“지금 죄인 취조하는 건가? 무죄 선고가 내렸어. 억울함을 벗었다고.”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한 사람을 옥에서 빼내기 위해 만인을 억울하게 만들었죠. 상하이의 선인(善人) 따위는 개나 줘버리십시오.”

왕대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포기를 모르는 기백은 할아버지를 닮았군. 그래야지 암 그래야 단독자의 삶을 이어받지. 자네가 독립군에 들어갈 때부터 장철호의 손자답다는 생각을 했…….”

“다 읽었습니다.”

말허리를 잘랐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 읽었다고요. 선인 아니 영웅은 장철호 씨더군요. 민족은행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권혁필 같은 협잡배와 끝까지 싸운 대장부. 이제 그 잘난 영웅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어디로 갈까요? 장소와 시간을 정하십시오.”

“오늘은 어려워.”

“혹시 병세가 악화된 겁니까?”

“할아버지가 걱정되긴 하나 보지?”

“죄를 밝히기도 전에 숨을 거두기라도 하면 큰 낭패니까요.”

“더 악화되진 않았어. 매일 의사에게 진료받고 있지.”

“그럼 왜 오늘은 안 된다는 건가요? 어디 먼 섬에라도 틀어박힌 겁니까?”

“제주도 남단 무인도에서라도 반나절이면 반민특위 사무실로 날아갈 수 있어.”

왕대인의 재력과 인맥이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시간을 끕니까? 장철호 씨가 나와의 만남을 거부합니까?”

“간절히 만나고 싶어 해. 다만 조건을 하나 내걸었어.”

“뭡니까 그 조건이?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하세요. 당장 만납시다.”

“자네한테 건 조건이 아니야.”

“그럼?”

“나야. 내가 그 조건을 완수해야 자넬 만나겠다고 해.”

“그게 대체 뭡니까?”

“중간 탈고!”

“중간 탈고라면……?”

“맞네. ‘BANK’ 다섯 번째 공책을 끝까지 채워 가져오래. 이 이야기까진 꼭 마치겠다고 장담했지만 내 말을 믿지 않더군. 아니 날 믿지 않는 것보다는 자네가 공책을 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눈치였어.”

정확한 추측이었다. 그냥 소설이라면 마지막 매듭을 찾아 읽을 법도 했다. 그러나 장철호를 뒤이어 반민법 해당자들에게 줄줄이 무죄나 예상을 깨는 가벼운 형량이 선고되었다. 그 모든 분위기를 내가 만든 것만 같아서 괴롭고 또 괴로웠다. 반민특위가 해체되면 그깟 소설의 마지막은 읽으나마나였다.

“그런데 탈고면 탈고지 그 앞에 중간이란 말은 왜 붙인 겁니까?”

왕대인이 얕은 기침을 뱉느라 즉답을 못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늦봄 감기라도 든 걸까? 집필을 서두르느라 밤잠을 설쳐 몸살이라도 났는가? 그러고 보니 목소리가 답답하게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