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소설 ‘BANK’>(250) 제5부 부국(富國)의 꿈, 중앙은행 : 서장 단독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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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장철호의 젊은 시절만 이야기를 만들어 보여주느냐고 따졌었지? 젊어 한때 애국을 했더라도 친일 행적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야. 자넨 자네 할아버지 장철호나 나 왕대인이 친일 혐의를 벗기 위해 ‘BANK’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그렇게 덜떨어지고 뻔뻔한 인간들로 보이느냐 이 말일세. ‘중간’이라고 왜 붙였느냐고 물었는가? 말 그대로지. 공책 다섯 권은 ‘BANK’에 담으려는 이야기의 절반 정도야. 어릴 때부터 1949년 지금까지 장철호의 삶을 전부 ‘BANK’에 풀어 넣는 것이 우리의 목표지. 그 속엔 물론 일제 36년 동안의 행적도 소상히 담을 예정이었어.”

그랬는가. 삶의 종착지까지 거대한 벽화를 그리려고 했는가.

“언제쯤 그 중간 탈고란 걸 할 예정입니까?”

“계속 쓰고는 있는데, 빨라도 일주일 어쩌면 열흘 넘게 걸릴지도 몰라.”

“열흘이라고요? 안 됩니다. 닷새 안에 마치십시오.”

절반으로 뚝 잘랐다. 단 하루도 기다리기 싫었다.

“……노력은 해보겠어. 눈도 침침하고 손도 무뎌서 온 종일 원고지를 채워도 진도가 나가지 않아. 마치면 곧 전화하지. 괜히 특경들 풀어 우릴 찾는 헛수고는 그만 두게. 알겠는가?”

왕대인으로부터 연락이 올 때까지 전화기 주위를 떠나지 못했다. 최소한 일주일은 걸린다고 했으니, 그 동안은 지방 출장을 다녀오고 외근을 다녀도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나는 화장실에 가는 시간조차 아끼며 전화기 곁을 지켰다.

환청까지 들려왔다. 장철호가 쓰러졌다는 마리아의 다급한 목소리부터 왕대인의 마지막 공책이 활활 타오르는 소리까지!

업무로 초조함을 지우기로 했다.

일본에 충성한 이들은 아직 많았다. 그중에서 내가 주목한 부류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학생들을 선동하여 전선으로 보낸 지식인들이다. 그들이 성전(聖戰)을 주장한 증거와 증인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들의 이름 석 자가 연설안내문이나 작품 첫머리에 또렷했기 때문에, 장철호의 재판에서처럼 뜻밖의 복병이 나타날 가능성은 적었다.

미국의 패망과 일본의 승전을 확신한 시를 연이어 발표한 시인을 체포 대상자로 삼고 팀장에게 약식 계획서를 올렸다. 보통 계획서를 올리고 나면 사나흘 안에 특경들을 이끌고 출동했기 때문에, 나는 그 시인의 작품들을 검토하느라 바빴다. 시인은 도망치지도 않고 대학에 출강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남산 아래 시인의 집까지는 차로 30분, 시인이 주 3회 강의를 맡은 대학교까진 45분이면 충분했다. 왕복 두 시간이면 작전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서 커피를 마시리라. 전화기 곁을 두 시간 떠난다는 점이 찜찜했다. 때마침 윤남수가 출근하자마자 나를 놀려댔다.

“이게 다 시집이야? 신춘문예라도 준비하나?”

“잘 오셨습니다. 두 시간만 제 자릴 봐주세요.”

“자리가 어디 도망이라도 간대?”

윤남수가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책상 서랍을 열고 어제 사 둔 담배 한 갑을 그의 점퍼 주머니에 우격다짐으로 넣었다.

“어, 어 이건 뇌물인가……? 알았어. 자리만 지키면 되지? 나중에 돌려달라는 말 없기야.”

“다녀와서 한 갑 더 드릴게요. 걱정 마십시오.”

윤남수가 못 이기는 척 담배를 챙긴 뒤 내 책상에 엉덩이만 살짝 걸친 채 시집을 펼쳐 들었다.

“소식 못 들었나 보네. 지금 조사 중인 건 말고 새로운 조사 착수는 당분간 보류래. 이 시인 만나러 가는 일도 어려울 거야.”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출동을 못 한다고요? 이유가 뭡니까?”

“역공 때문이야.”

“역공이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