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소설 ‘BANK’>(253) 제5부 부국(富國)의 꿈, 중앙은행 : 서장 단독자-5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대답 대신 왕대인이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들었다.

“주십시오.”

“아직은 아니지. 오늘 밤 장 은행장이 먼저 읽고 그다음이 손자인 자네 순서야.”

“어차피 첨삭할 것도 아니라면 지금 주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마리아가 대신 답했다.

“장 은행장의 시력이 하루가 다르게 떨어져 걱정이야.”

“눈이 멀고 있단 말인가요?”

“그래. 풍병을 앓은 후유증이기도 하고 평생 은행 업무를 보느라 눈을 혹사한 탓이기도 하고. 하여튼 내 생각에도 장 은행장이 먼저 보고 그 다음에 네가 봤으면 해. 그래 봤자 하루 차이밖에 나지 않을 거야. 기다리렴.”

두 사람이 떠난 뒤 나는 다시 잠에 취했다. 칼을 맞은 옆구리가 결려 눈을 떴을 때, 석양이 창을 통해 병실을 발갛게 비췄다. 문이 열리더니 간호사와 의사가 휠체어를 가지고 급히 들어왔다.

“왕대인께서 급히 뫼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불길했다. 계획이 바뀔 이유는 하나뿐이다. 장철호가 숨을 거두었는가.

장철호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의사는 휠체어를 권했지만 나는 엉거주춤 허리를 숙인 채 걸었다. 링거 줄을 높이 든 간호원이 따라붙었다. 마당까지 나와서 기다리던 마리아가 와락 나를 안고는 눈물을 쏟았다.

“장철호 씨는…….”

마리아가 손으로 내 뺨을 어루만지더니 제 뺨에 대고 비볐다.

“들어가 보렴. 불쌍한 녀석!”

어둡고 긴 복도를 걸은 후 방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방 안에선 인기척이 없었다. 문을 열었다. 아랫목에 장철호가 누워 있었다. 향내가 짙었다. 바람이 열린 문을 통해 서안 위 향을 흔든 것이다.

숨이 끊겼는가 아니면 잠든 것인가. 나는 무릎걸음으로 장철호의 머리맡까지 다가갔다. 손을 뻗어 코 밑에 검지를 대려는 순간 그가 눈을 번쩍 떴다. 나도 모르게 허리를 펴고 주춤거렸다. 칼에 찔린 옆구리가 결렸지만 소리를 삼켰다.

“……왔느냐?”

그가 팔을 들어 올렸다. 내 얼굴과는 거리가 먼 엉뚱한 허공을 잡아 쥘 듯 저었다.

눈이 기어이 멀고야 말았는가. 다시 허리를 숙여 그의 왼팔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가 내 머리를 바짝 당겼다. 그의 왼손이 뜨겁고 축축했다.

“……상처는 어떠하냐?”

왕대인과 마리아에게서 내가 다쳤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으리라.

“괜찮습니다.”

장철호는 잠시 침묵했다. 가쁜 숨을 진정시키고 힘을 모으기 위함이었다.

“많은 놈들이……널 노릴 게다……멍청하게 당해선 안 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 아버지 장두선은 할아버지 장철호를 반드시 벌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나는 그 유언을 지키기 위해 반민특위에 들어갔고 장철호를 재판정에 세웠다. 그런데 장철호는 눈이 멀어가면서도, 자신을 감옥에 넣고 재판정에 세운 내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암살자들에게 당할 장대한이 아닙니다.”

내 뺨에서 떨어져 나간 장철호의 왼손이 천천히 날개를 접듯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나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지지는 않고, 서안을 정확히 가리키며 멈췄다. 아마도 그 서안은 장철호가 이 저택을 구입한 후 줄곧 그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그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내 고개도 돌아갔다. 그리고 서안 위에 놓인 공책에 시선이 멈췄다. ‘BANK 5’라는 제목이 선명했다. 장철호가 주먹을 쥐며 작지만 분명하게 명령조로 말했다.

“……읽거라!”

읽지 못할 만큼 눈이 멀자, 내 목소리로 소설을 듣기 위해 급히 나를 찾은 것이다. 첫 장을 폈다. 그리고 왕대인이 중간 탈고한 공책을 읽기 시작했다.

“제1장 황제의 꿈…….”＜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