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공동체, 이웃이 희망이다>프랑스語 배우는 81세 뱅고다氏 “몸 아파도 학교는 꼭 가죠”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5월 28일 영국 런던 햄프스티드(Hampstead) 지역에 위치한 U3A(University of the Third Age) 런던지부의 한 강의실에서 노인 학생들이 프랑스어 수업을 듣고 있다.

지난 5월 28일 오전 영국 런던 북쪽에 위치한 마을 햄프스티드(Hampstead). 영국 내에서도 노인 인구 비율이 높은 햄프스티드는 대부분의 가구가 자녀 없이 노부부끼리 혹은 홀로 사는 노인으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햄프스티드의 아침은 활력이 넘쳤다. 이날 아침 기온이 영상 10도가 채 되지 않고 비바람까지 몰아치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노인들이 한 손에 커피, 다른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마을 끝자락에 위치한 구 시청 건물로 걸음을 재촉했다. 백발 할아버지부터 뚱뚱한 데다 관절까지 좋지 않아 한 걸음 내딛기 힘든 할머니까지 느린 걸음이었지만 노인들의 표정은 젊은 직장인들보다 더욱 진지했다.

이들은 모두 ‘U3A(University of the Third Age)’ 런던지부로 등교하는 학생들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노인대학에 해당하는 U3A는 런던지부에만 1800명이 넘는 학생이 있고 영국 전체에 800곳이 넘는 지부가 있다.

건물 2층에 들어서자 A4 용지에 U3A 사무실이라고 적힌 곳이 눈에 띄었다. 사무실에는 노인 직원 4명이 휴가를 받아 자리를 비운 원장 대신 아밀리 미카엘(여·81) 부원장의 지시 아래 업무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직원들 모두 80∼90대로 귀가 잘 들리지 않는 탓에 가끔씩 고성이 오가기도 했지만 웃음과 수다가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자치 조직으로 움직이는 U3A의 살림을 도맡은 봉사자들로 이날 업무는 수업시간표와 학생 명부 정리였다. 학생들이 놓고 간 자동차 열쇠를 맡아주기도 하고 커피를 대접하는 일도 이들의 업무였다. 모든 일은 젊은이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모인 그들의 몫이었다. 버니스 컬리넌(여·83)은 “나는 차를 대접하는 일과 사무 행정을 보고 있다”며 “일주일에 3번 오는데 아침에 시작해서 오후 3시에 퇴근한다”며 손수 만든 따뜻한 커피와 파이를 대접했다.

건물 안쪽에서는 수업이 한창이었다. 프랑스어와 히브리어, 카드게임, 미술 등 각각의 교실에서 진행되는 8개의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눈빛은 어린 학생들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프랑스어 수업에서는 학생 19명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한 페이지씩 돌려가며 읽고 분석하는 수업이 한창이었다. 한 귀에 듣기에도 유창한 프랑스어를 하고 있었다. 잡담을 하거나 딴짓을 하는 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학생들 중에는 과거 프랑스어 교수도 있었고 고등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쳤던 교사도 있었다. 미카엘 부원장은 “재미삼아 프랑스어 수업을 하는 게 아니라 U3A에서 자신의 프랑스어 실력을 더 늘리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바로 옆 교실에서는 카드놀이 수업이 진행됐다. 나이와 인종이 다른 노인 6명이 네모난 테이블에 둘러앉아 카드놀이를 진행하고 있었다. ‘브리지’라고 불리는 카드놀이는 치매 예방은 물론 사교적 목적으로도 좋아 U3A 런던지부에만 10개의 강좌가 개설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U3A의 모든 수업은 자원봉사로 진행된다. 자신이 뛰어난 분야가 있으면 어느 날은 학생이 되기도 하고 어느 날은 선생이 되기도 한다. 특별한 자격증은 필요하지 않지만 실력이 없거나 인기가 없는 강좌는 얼마 지나지 않아 폐강되는 수모를 겪기 때문에 강의 수준을 높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강의에 나서는 선생들은 대부분이 교수 출신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이뤄져 있다. 이 같은 수준 높은 강의를 듣는 데 학생들은 연간 10만 원가량의 수업료만 지불하면 된다.

지난 1982년 출범한 U3A는 정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고 노인들 스스로 꾸려나가는 일종의 자치공동체다. 그 흔한 젊은이 자원봉사자조차 없다. 하지만 지난 30년간 계속 조직을 확장해온 것은 물론 운영도 꾸준히 개선시켜 왔다. 런던지부의 경우 수업할 곳이 없어 각급 학교 건물들에 세들어 살다 지금의 건물로 옮기는 데 17년이 걸렸다. 강의도 점차 늘고 있다. 5월 기준 매주 런던지부에서만 150개 강의가 진행되고 있다. U3A는 정규수업 이외에도 매주 월요일 명사 초청 특강인 ‘먼데이 토크’를 진행한다. 헬렌 보든 BBC 보도국장을 비롯해 존 버커 하원의장, 영화 ‘피아니스트’에 출연한 여배우 모린 립먼 등이 특강을 진행했다. 이들에 대한 섭외 역시 모두 U3A 학생들의 인맥을 통해 직접 성사시켰다. 학생들은 명사들과 인생이야기를 하고 그들로부터 영국 사회와 관련한 여러 이야기를 들으며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건강한 노년을 위한 의학 지식도 끊임없이 새롭게 업데이트되고 있다.

U3A는 지역 노인들의 삶의 일부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곳이 아니라 여전히 배움을 원하는 노인들의 욕구를 채우고 있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건물 내에 따로 마련된 카페와 휴게실에서 샐러드와 파이 등으로 식사를 해결하고 도란도란 어울려 커피 타임을 즐기며 큰 소리로 웃고 대화하는 노인들에게서 노년의 고독함이나 외로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남편을 잃고 혼자 된 이후 U3A에 4년째 다니고 있다는 필리스 뱅고다(여·81)는 이곳에 오기 위해 전날 저녁 시계 알람을 맞추고 외출준비를 하는 일이 삶의 낙이라고 말했다. 과거 잡지 편집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히브리어와 시, 역사 수업을 듣고 있는 그는 U3A와 동료 학생들이 아니었다면 집에서 하루 종일 TV나 보며 늙어가는 노인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런던 = 글·사진 정유진 기자 yooji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