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표 예술경영인으로 꼽히는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은 은퇴 후 공연예술인들의 가교 역할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9개월여 남은 임기 동안 충무아트홀을 ‘명품’ 공연장으로 도약시키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정하종 기자 maloo@munhwa.com
이종덕(79) 서울 충무아트홀 사장의 이름 앞에는 ‘공연계의 대부’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닌다. 지난 50여 년간 무대 예술인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우리나라 공연문화 발전에 기여해온 그에게 딱 맞는 수식어지만 그를 직접 만나보면 ‘대부’라는 거창한 느낌보다는 인자하고 따뜻한 이웃집 할아버지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지난 1963년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문화과 공무원으로 공연계와 인연을 맺은 그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과 서울예술단을 거쳐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성남아트센터, 충무아트홀까지 국내 대표적 공연장의 사장을 모두 역임했다. 이렇듯 우리나라 최고의 예술경영인으로 꼽히는 그이지만 항상 자신이 조명을 받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려 한다. 그는 자신을 무대 위에 서는 ‘앞광대’를 무대 뒤에서 돕는 ‘뒷광대’라고 칭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뭐 대단하다고 나를 인터뷰해. 차라리 우리 자체 제작 뮤지컬에 출연하는 배우들이나 해줘.”
1일 서울 중구 흥인동 충무아트홀 사장실에서 만난 이 사장이 처음 한 말이다. 그가 수많은 무대 예술인들에게 존경받으며 평생을 한길로 걸어올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2011년 충무아트홀 사장으로 취임한 그의 임기는 올해 1월에 끝났지만 최창식 서울 중구청장의 요청으로 2015년 1월 17일까지 1년 연장됐다. 올해 개관 10년을 맞은 충무아트홀을 ‘명품’ 공연장으로 한 단계 도약시키기 위해서는 그의 경륜이 더 필요하다는 의미다.
‘연장된 임기 동안 어떤 일을 할 계획이냐’고 묻자 “일은 항상 연속성이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뭘 새로 하겠어요. 지금까지 해온 일을 더 다지고, 후배들이 신나게 일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주면 되죠. 뮤지컬로 특화된 우리 공연장의 특성을 더욱 살리면서 모든 연령층의 관객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찾는 품격 있는 공간을 만드는 데 주력할 계획이에요. 또 지역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도 많이 만들어야죠.”
충무아트홀은 개관 10년을 맞아 약 30억 원의 제작비를 투입해 지난 3월 자체 제작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을 무대에 올렸다. 이 뮤지컬은 ‘창작 뮤지컬 활성화’를 추진해 온 이 사장의 두 번째 자체 제작 작품이다.
“성남아트센터 사장으로 있을 때 뮤지컬 ‘남한산성’을 자체 제작한 후 이번이 두 번째예요. 그때는 새로 만든 공연장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초연’과 ‘자체 제작’을 고집했어요. 당시 뮌헨오케스트라가 성남에서만 공연하고 돌아갔어요. 대단한 일이었죠. ‘남한산성’은 흥행에 실패했지만 이번 ‘프랑켄슈타인’은 큰 성공을 거둘 것 같아요. 개막 전부터 반응이 뜨거웠거든요. 첫 공연을 보며 울컥했어요. 이렇게 멋진 작품을 기획한 우리 직원들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올해 초에는 자신의 무대인생을 정리한 책 ‘공연의 탄생’을 출간했다. 10여 년 전에 펴낸 ‘내 삶은 무대 뒤에서 이루어졌다’는 이 사장이 만난 사람들과 그의 행적을 사진으로 펼쳐낸 책이지만 이번 책은 그가 현장에서 겪은 생생한 경험들이 깨알같이 담겨 있다. 그는 “후배들에게 읽혀지는 책을 쓰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 책에는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을 비롯해 강수진 국립발레단 단장, 김동호 문화융성위원장, 영화배우 문희, 연극배우 박정자 등 쟁쟁한 문화예술인들의 축사가 실려 있다. 이들은 또 이 사장을 위해 헌정 출판기념회도 열었다.
“‘헌정’은 대학생들이 교수한테 해주는 거라 처음에는 사양했어요. 그랬더니 ‘이런 전례를 남겨야 나중에 우리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아무 말 못하고 허락했죠(웃음). 그날 이런 후배들이 있다는 기쁨에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이번 책은 논리적으로 쓴 게 아니고, 현장에서 많은 경험을 하며 무에서 유를 창조해온 내 경험담을 고스란히 담아냈어요.”
이 사장은 처음 문공부에 들어갔을 때 영화과 근무를 원했다. 하지만 당시 문공부 공무원으로 있던 그의 사촌 매형이 “영화과에 가면 위험하다”며 만류해 뭐하는 곳인지도 모른 채 문화과로 가게 됐다.
“영화배우들을 직접 만나보고 싶어서 영화과를 원했죠(웃음). 그런데 당시에는 공무원이 영화업자들과 어울려 다니며 돈을 받는 일이 많았어요. 사촌 매형이 문화과로 가라고 해서 그냥 갔어요. 당시 문화과에서는 공연예술에 관한 모든 행정을 담당했어요. 지금은 2개의 국과 10여 개의 과에서 처리하는 일이죠. 무용단과 함께 해외공연도 다녔고, 정말 다양한 일들을 경험했어요.”
그의 이런 영화에 대한 관심이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됐다. 충무아트홀은 2010년 중단된 충무로영화제를 다시 살리기 위한 준비작업을 하고 있다.
“올해 준비해 내년부터 다시 영화제를 열 계획이에요. 처음에는 ‘충무로 페스티벌-스타’(가칭)라는 명칭으로 축제 분위기의 행사를 진행하고, 점차 영화제의 틀을 갖출 예정이에요. 이장호, 배창호 감독을 중심으로 젊은 감독들이 참여하고, 이상봉 씨 등 디자이너들도 힘을 합쳐 알찬 행사를 기획하고 있어요.”
이 사장이 50여 년간 한길로 걸어올 수 있었던 동력은 ‘청렴’과 ‘순발력’이다.
“제가 워낙 사람을 좋아해서 이 사람 저 사람과 만나다보니 정치인들도 많이 알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정치를 하려 한다’는 소문도 돌았죠. 또 일을 하며 돈의 유혹도 많았어요. 그때마다 ‘청백리의 자손인 내가 돈을 가까이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죠. 제가 오리(梧里) 정승 이원익의 14대손이거든요. 문예진흥원 상임이사 임기를 마쳤을 때 당시 장관이 제게 ‘어느 자리로 가고 싶으냐’고 물으며 골프장 사장 자리를 제안했어요. 돈이 많이 생기는 자리죠. 하지만 거절하고, 바로 서울예술단으로 갔어요. 또 제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기면 앞뒤 안 재고 바로 달려가는 성격이에요. 서울예술단을 예술의전당으로 들어가게 하려고 당시 국회에 있던 장관을 찾아가 의원식당에서 사인을 받아 왔을 정도예요(웃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장직을 맡으면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실적 올리는 데 혈안이 된다. 하지만 이 사장은 새로운 땅에 씨를 뿌려 물을 주고, 싹을 틔우는 데 전념해왔다. 그의 예술경영 철학이 그렇다.
“러시아 예술을 전 세계에 알린 디아길레프라는 예술행정가가 있어요. 그는 예술가도 아니고 공연기획자도 아니었죠. 그저 문화예술인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그들을 위해 일했어요. 저는 디아길레프 같은 예술경영인이 되고 싶었어요. 제 이름을 알리기보다 제가 몸담고 있는 공연장을 살리는 데 주력했죠. 문턱이 높아 관객들이 안 찾던 예술의전당의 입구 동선을 바꿨고, 세종문화회관 초대 민영 사장으로 부임해 공연장 문화를 송두리째 바꿨어요. 또 새로 만들어진 성남아트센터를 최고의 공연장으로 키웠고요. 지금까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도중하차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게 가장 자랑스러워요.”
그에게 ‘우리 공연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 뭐냐’고 물었다.
“이런 말 하면 공연예술인들에게 미움을 살지 모르지만 할 말은 해야죠. 한번 뜨면 아무 노력을 안 하고, 그저 이름값으로 버티는 게 가장 큰 문제예요. 대중이 알아주는 스타가 됐더라도 무대에서 죽는다는 각오로 최선을 다해야죠. 외국에는 90세 넘어서까지 공연하는 무용가도 있어요. 그 무용가가 공연을 끝내자 모든 관객들이 일어서서 10분 이상 박수를 쳐주는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어요. 우리나라 예술인들도 그런 정신을 배워야 해요.”
이 사장은 자신이 걸어온 길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모든 걸 내려놓고 욕심 없이 후배들을 위해 뭔가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공직에 몸담고 있는 게 제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저를 도와 열심히 일해 준 수많은 후배들이 있어서 가능했죠. 지난해에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장으로 오라는 제안을 받고 수락했는데 충무아트홀 사장 임기가 연장되며 겸직을 하게 됐어요. 물론 단국대에서는 보수를 안 받고 있죠(웃음). 내년에 임기를 마치고 학교로 가면 제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후학들을 지도할 생각이에요. 제가 경험한 모든 것을 전해주고 싶어요. 물론 그때는 월급을 받아야죠(웃음).”
그는 ‘공연계의 대부’라는 수식어를 무척 좋아한다.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대부’로 불렸어요. 영화 ‘대부’의 말런 브랜도 같다고요(웃음). 제가 의리 있다며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에요. 제가 좀 그런 기질이 있어요. 강한 사람한테는 강하게 대하고, 약한 사람들을 만나면 한없이 부드러워지죠. 공연계에서도 ‘대부’로 불릴 수 있어 정말 기뻐요. 제겐 과분한 호칭이죠. 몇몇 공연계 사람들이 제가 부지런하다고 ‘돌쇠’ ‘마당쇠’ 등의 별명을 붙여줬는데 그건 마음에 안 들어요(웃음).”
세는나이로 여든이 된 이 사장은 요즘도 직원들과의 술자리에 빠짐없이 참석한다. 또 해외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에도 공연장에 들러 일을 챙길 정도로 체력도 좋다.
“젊었을 때는 소주 5병을 거뜬하게 마셨는데 요즘은 좀 줄었어요. 그래도 직원들 회식에는 꼭 참석해서 폭탄주를 만들어 돌려요(웃음). 직원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즐거우니까요. 얼마전에 미국 시카고로 출장을 갔었는데 오는 날 비행기가 연착해 8시간 이상 공항에서 기다린 후 14시간을 비행기를 타고 왔어요. 그날 오후에 도착해 1시간쯤 운동을 한 후 공연장 행사에도 참석했고요. 평생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을 해온 게 제 건강 비결이에요.”
그는 모든 자리에서 물러난 후 공연인들의 가교 역할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필요한 사람들끼리 만나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힘을 합치면 엄청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모르고 지내는 게 안타깝거든요. 그렇게 공연인들을 연결해주는 일을 하며 마지막까지 그들과 함께하고 싶어요. 남에게 기쁨을 주는 일을 하는 게 가장 행복하잖아요.”
인터뷰=김구철 차장(전국부) kc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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