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수의 마흔 이후 남자의 생존법>그만 달려가고 걸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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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았다. 나이가 어려서는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원하는 일들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 하나로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왔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은 많아졌다. 시간을 내서 잠시 쉴 수도 있고 사고 싶은 물건들을 어렵지 않게 구입할 수도 있게 됐다. 내 주변의 사람들도 이름 석자를 대면 알 수 있는 알려진 사람들도 있다.

젊었을 때 내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이제는 이만큼 이뤘으니 여유를 갖고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정작 내게는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꽉 채워진 일정표에 이끌려 다니는 내 모습은 지쳐 있었다.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 내가 해야 할 강의들, 내가 써서 보내줘야 할 원고청탁서들이 나를 붙들고 있는 것들이었다. 이런저런 일들에 이렇게 저렇게 끌려다니고 있었다.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은 그냥 주어진 것들이 아니었다. 나이만큼이나 분주하게 달리고 나면 주어지는 전리품들이었다.

풍성한 식탁에 나는 오늘 가족들과 함께하지 못했다. 방송국에 보낼 강의안과 청탁 받은 원고를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수고한 땀의 열매로 가족들이 즐겁게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위안 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중년이 되어 이제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내 인생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전히 달려가고 있었다.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내 인생을 헤쳐 나가고 싶어 더 큰 몸짓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나 자신이 두려워졌다. 이러다가는 내 인생의 속도를 못 견뎌서 넘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도를 늦추고 걸어가야겠다고 결단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결정한 것들을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가지 어려운 일은 멈추기로 결정했다. 거의 마무리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프로젝트를 스스로 멈춰 서게 만들었다. 더 이상 분주해지지 않도록 내 인생의 속도를 낮추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서울을 떠나 한적한 숲속으로 들어갔다.

일상을 벗어나 깊은 숲속 길을 걸으면서 스스로에게 “성급하게 그만 달려가고 걸어가 보자”고 다짐했다. 삶의 목적과 방향이 정해진 삶을 사는 나는 요즘 내 인생의 속도를 더 많이 생각하고 있다. 내가 발견한 삶의 목적과 방향을 향해 평생을 달려가기 위해서는 어떤 속도로 어떻게 가야 할지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된 것이다.

달리듯 살아가는 내 일상 속에서 내가 놓치고 사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KTX를 타고 달리는 것과 같은 인생이었다. 멀리 있는 풍경은 잘 보이는데 정작 아주 가까이 있는 소중한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하며 마음을 살필 겨를이 없었고, 내 주변에 계절을 따라 피고 지는 소중한 자연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생명이 꿈틀대는 봄 숲길을 걸으면서 막 피어난 바람꽃을 볼 수 있었다. 허겁지겁 달릴 때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야생화들과 돋아나는 새싹들과 새싹을 움켜쥐고 있는 나무들을 보면서 내 마음이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너무 빨리 달리다 놓쳤던 소중한 것들을 되찾아 마주하니 내가 행복해진다. 나와 마주하고 있는 아내의 표정 속에 담긴 마음이 읽어지고, 훌쩍 커 버린 자녀들의 생각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이라도 깨달아야 할 진리가 있다. 나이 들어 너무 빨리 달려가려고 그렇게 애쓸 필요 없다. 기껏 달리고 달려 돌아올 자리는 내 가족과 함께 하는 집이기 때문이다.

Leeyuesu@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