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초대석>“직접 무대 서는 것도 즐겁지만 후배 코치하는 건 더 행복”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매일 꾸준하게 국립발레단 연습실과 집에서 발레 동작을 연습하는 강수진 예술감독. 취임 후 발표한 두 편의 고전발레 ‘라 바야데르’ ‘백조의 호수’에 이어 오는 10월 ‘봄의 제전’ 등 신고전·현대발레를 선보인다. 김연수 기자 nyskim@munhwa.com

세계적인 스타발레리나 강수진(47)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그가 지난 2월 4일 국립발레단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하면서 서울생활을 시작한 지도 2개월이 지났다. 강 감독은 그동안 정기공연을 통해 두 편의 고전발레 ‘라 바야데르’와 ‘백조의 호수’를 무대에 올렸다. 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 1986년 입단, 1997년부터 수석무용수로 활동해온 그는 지난 7일 그 공로를 인정받아 독일 주정부의 공로훈장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서울 와서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두 달 새 한국말 표현이 많이 늘었어요. 누군가와 이야기하면서 들었던 말을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서 써보는 식으로, 말도 많이 배우고 있어요.” 현역 발레리나로서 발레단 예술감독을 겸하고 있는 그는 “발레단 일이 새로운 것도, 낯선 일도 아니다”며 새로 맡은 역할에 대한 자신감을 보였다. 지난 3일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4층에 위치한 국립발레단 단장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강 감독은 “세계 각지에서 겪은 그동안의 경험이 ‘도로아미타불’은 아닌 듯하다”고 웃었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발레단 측은 “강 감독이 공연 직전엔 무대에 몰두하느라 다른 일정을 잡지 않는다”며 인터뷰를 공연 1주일 전, 그것도 틈새시간인 점심 무렵이 좋겠다고 알려왔다. 인터뷰는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10∼13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공연을 1주일 앞둔 지난 3일 낮 12시 20분부터 진행됐다.

강 감독의 하루는 연습실에서 매일 오전 11시 발레 기본 수업으로 시작된다. 인터뷰 날도 검은 훈련복 차림의 강 감독은 단원들과 함께 소 연습실에서 바를 잡고 80분여 발레동작을 연습한 뒤 단장실로 자리를 옮겼다.

―‘발레리나 강수진’이 아닌, ‘예술감독 강수진’으로서 발레 공연을 지켜보는 느낌이 이전과 다를 것 같습니다.

“아이들(강 감독은 단원을 줄곧 ‘아이들’이라고 불렀다)이 연습 때와 또 다르게 무대에서 발전한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행복했어요. 감독을 맡은 뒤 한 달여 만에 ‘라 바야데르’를, 그리고 ‘백조의 호수’는 두 달여 만입니다. 주역뿐 아니라 군무도 기대 이상으로 결과가 잘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강 감독은 지난 11일 ‘백조의 호수’ 공연 직후 지그프리트 왕자와 악마 로트바르트를 번갈아 연기한 발레리노 이재우 씨를 솔리스트에서 (그랑솔리스트를 거치지 않고) 수석무용수로 승진시키는 파격 인사를 단행했다.

―국립발레단서 선보인 최초의 두 작품이 익숙한 레퍼토리들입니다.

“사실 발레단 예술감독은 보통 1년 전에 선정됩니다. 그러나 제 경우는 임기 시작하기 한 달 전 정해졌어요. 신작을 발표하기란 시간적으로 무리였지요. 기존 레퍼토리 중에서 할 수밖에 없었어요. 발레단이 지난해 발표한 ‘라 바야데르’는 많은 경비를 들여 만든 작품을 한 번 무대에 올리고 제쳐두기는 아깝다고 생각해 선택했습니다. ‘백조의 호수’는 발레단이 자주 발표해온 작품이고요.”

―두 작품은 발레리나로서도 익숙하시겠네요.

“‘백조의 호수’는 군무로 출연했고, ‘라 바야데르’는 주역인 니키아 역을 제안받은 적이 있지만 내가 니키아가 아니라고 생각해 ‘노 생큐’했어요.”

―발레리나의 대명사인 ‘백조의 호수’ 중 오데트와 오딜을 안 해봤다니 의외입니다.

“내가 오데트와 오딜, 또 니키아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발레의 모든 작품을 존경하지만, ‘나의 백조’는 군무로 만족하고 또 행복했어요. 스스로가 백조를 못 만들 것 같으면 안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요.”

―발레단 감독이라는 역할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셨겠네요.

“생각보다 수월해요. 살아가는 게, 사실 모든 게 시작하기 전 생각만 할 때는 스트레스잖아요. 그러나 막상 부딪혀 보니 생각에 비해 큰 어려움이 없어요. 그리고 제 스스로가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기 때문에 정작 시작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덜 받는 편이에요. 스트레스도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또 그동안 한국서는 공연만 해서 한국분들이 제 생활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공연만 하는 건 아니고, 어디를 가든 후배를 지도하는 게 익숙한 일상이에요. 직접 무대에 서는 일도 즐겁지만 무용수를 코치하는 일도 늘 행복합니다.”

행정 경험이 없는 그가 발레단 감독을 맡는다는 데 대한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강 감독은 “시간도 부족하고 행정에 대한 어려움이 있기는 하다”면서도 “배우는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에 크게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발레단 운영과 관련해 서류 결재, 숫자 생각을 하면 당연히 걱정이 되지요. 그러나 뭐든 쉬운 건 없잖아요. 또 아는 것도 잘하려면 쉽지 않고요. 무엇보다 제 자신이 쉽게 살아온 인생도 아니거든요.”

그는 “어느 나라나 극장마다 자기들만의 문화와 시스템이 있고 그런 경험을 되살려 관행 중에서 좋은 건 이어가며 무용수의 기량을 향상시키고 발레단을 글로벌하게 이끌어보겠다”고 다짐했다.

강 감독은 오후 6시 발레단 퇴근시간을 넘겨 오후 7, 8시쯤 귀가해 집에서도 못다한 행정 업무를 본다. 그는 “발레단 운영 방식은 현장에서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며 “공연을 통해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한국 사람, 한국 시스템이 새로울 뿐 행정 일 자체가 아주 낯설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번 시즌은 서로서로 배워가는 과정”이라며 “고전발레에 이어 가을엔 신고전이나 현대발레를 준비 중”이라고 소개했다. 국립발레단은 오는 10월 우베 숄츠의 ‘교향곡 7번’과 글렌 테틀리의 ‘봄의 제전’ 등 국내 미공개작인 고난도의 까다로운 작품을 선보인다. 두 작품은 강 감독이 “국립발레단장직을 맡는 순간 떠올랐던 작품”이라며 각별한 의지와 발레인으로서 개성을 드러내는 무대다.

“21세기의 글로벌한 발레단, 글로벌한 무용수가 되려면 고전뿐 아니라 현대발레까지 다 소화할 수 있어야 해요. 두 작품은 발레단들이 꺼릴 정도로 어렵고, 또 단원 모두가 하나가 돼야 완성되기 때문에 결코 수월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을 갖고 차근차근 연습하면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작품을 소화해내면 우리 발레단의 수준도 한 단계 올라갈 것입니다.”

―한국발레의 수준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아이들 테크닉이 아주 좋아요. 재능과 잠재력이 있고 또 가르쳐주는 대로 흡수력도 빨라서 굉장이 보람을 느낍니다. 관객도 많이 발전했어요. 똑같은 역을 맡은 무용수별 특성을 비교해 보는 등 수준 높은 국내 관객들에게 다양한 신작을 적극 소개하겠습니다. 발레는 자꾸 접할수록 재미있어요. 한 번 볼 때보다 두 번 볼 때가 더 재미있고, 세 번째 보면 감동이 더 커지죠.”

―현역발레리나와 발레단 감독이라는 두 역할을 병행하려면 어려움이 많을 텐데요.

“발레리나로선 시간이 많이 모자라요. 그러나 그걸 감수하고 감독 역할을 맡았으니, 일과에서 발레단 일이 ‘넘버 1’이에요. 발레리나로서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해야지요. 모자라는 부분은 집에 들어가 새벽에라도 연습합니다. ‘나비부인’ 공연은 7월이니, 본격 연습은 6월쯤 시작할 겁니다.”

―47세의 나이에 전막발레의 주역이라니, 세계적으로 이례적이 아닙니까. 나이를 의식하는 순간은 없습니까.

“오히려 젊었을 때가 싫었어요. 지금처럼 발레를 즐기지 못했거든요. 그때는 무용에 대해 알 것 같아도 몸이 말을 안 들었어요.”

그동안 “발레가 너무 재미있어 열심히 했고 그러다 보니 더 재미있어서 지금껏 발레무대에 서고 있다”는 강 감독에게 발레의 묘미를 물었다.

“발레는 테크닉만으로 되지 않아요. 그저 잘 뛰고 돌기만 한다면 몇 번 보면 그걸로 끝이지요. 그러나 발레에 혼이 들어가고 테크닉의 하모니가 이뤄지고 음악성이 더해지는 종합예술이라는 점에서 발레를 존경하게 됩니다. 발레는 똑똑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가 없어요.”

강 감독은 “모나코발레학교 시절, 선생님은 스텝 하나하나에 혼이 들어가지 않으면 예술이 아니라고 가르치셨다”며 “일요일이면 차를 몰고 피렌체, 빈으로 데리고 다니며 미켈란젤로, 로댕의 조각 같은 명작을 보여주셨다”고 말했다.

―발레단 운영의 목표, 최우선으로 여기는 점이라면.

“감독 직을 맡을 때 바람이 단원들을 더 발전시키고 한국 발레가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었어요. 제가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단원들의 잠재력을 끌어내 키우도록 지도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사를 서두르고 결과에도 성급한 경향이지만, 차근차근 마이너스적인 부분의 밸런스를 맞추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단원들에게 나만의 개성을 강조하신다죠.

“발레리나를 예로 들면 연륜과 경험이 풍부한 김지영, 그리고 이은원 김리회 박슬기가 연기하는 백조는 각기 달라요. 테크닉, 신체조건이 다르기도 하지만 사람마다 분위기와 사랑의 표현이 다르듯 춤도 다를밖에요. 무용수별로 특징적인 느낌을 끌어내고 밸런스를 맞추도록 조언해주는 것이 감독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15세 때 유럽으로 건너갔다가 32년 만에 다시 시작한 서울생활은 어떠십니까.

“독일 슈투트가르트서는 집과 연습실이 걸어서 5분 거리였어요. 서울서도 발레단과 가까운 방배동에 집을 구했지만 교통체증으로 출퇴근 시간이 늘어나 그게 좀 아쉬워요. 서울 온 지 두 달 동안 부모님 집에 간 게 딱 한 번뿐이에요. 아버님이 독일 살 때보다 목소리 듣기가 더 힘들어졌다고 아쉬워하세요. 독일선 정기적으로 전화통화했지만 요즘 지리적으론 부모님과 가까워졌지만 전화도 잘 못했거든요.”

발레단 일로 바삐 뛰어다니느라 강 감독은 아침식사는 거르고 점심은 발레단 업무 틈틈이 샌드위치로 대충 먹고 저녁은 집에서 중국식, 한식 등 배달시켜 먹는다고 했다.

“남편도 발레단이며 제 일을 봐주느라 굉장히 바빠요. 이런 생활이 처음은 아니에요. 2002년 결혼 후 줄곧 그래 왔으니까요.”

슈투트가르트발레단 발레리노 출신인 강 감독의 터키인 남편 툰치 소크만(54)은 현재 국립발레단의 ‘게스트 코치 앤드 어드바이저’를 맡아 발레단을 지원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강 감독과 함께 보낸다. 강 감독은 남편이 결혼 전인 1996∼1997년 무렵 터키 이스탄불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며 한국∼터키 여행사업을 진행하기도 했지만 기질적으로 한국사람,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가 각별하다고 소개했다.

인터뷰=신세미 부장(문화부) ssem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