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거꾸로 쓰는 日>SF 조약 재연?… ‘美의 中견제 전략’ 교묘히 이용하는 아베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일본이 식민지근대화론·대동아공영권 논리에 뿌리를 둔 ‘전후 아시아(한국) 경제발전 기여론’을 내걸고 국제사회의 여론을 조작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2일에도 “일본은 음덕을 쌓아왔는데 대외공헌이 외국에 충분히 알려지지 않아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의지를 곧추세우고 있다. 아베 정권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전후 발전 기여론’을 밀어붙이는 데 교묘하게 악용하는 역사적 사건이 1950년대 샌프란시스코 대일(對日) 강화조약이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주도 아래 연합국 51개국이 전범국 일본과 1951년 9월에 맺은 뒤 이듬해 4월 발효된 조약이다. 당시 한반도 상황을 잘 알지 못했던 미국을 상대로 일본이 주도면밀하게 사실을 호도하면서 당시 과거사 청산은 미해결 과제로 남게 됐다. 그뿐만 아니라 미·일안전보장조약 체결과 일본 재무장의 길을 터놓은 것으로 평가되는 조약이다.

1951년 한반도 몰랐던 美
日‘재무장의 길’열어준 셈
천황제 유지… 戰犯 총리로

‘소련 견제’ 美의 우군된 日
과거사 청산 ‘지속적 시도’
美 - 中 대립 現상황 기회로

60여 년 뒤 아베 총리는 당시와 유사하게 재현되는 국제역학 관계를 활용해 미국을 흔들고 있다. 아베 총리가 최근 대미외교에 올인하며 평화헌법 개정, 집단적 자위권 강화를 통한 보통국가화와 역사수정주의에 드라이브를 거는 것도 당시와 똑같은 전략이다. 1950년대 미국이 소련·중국 등 공산권 견제에 다급한 나머지 일본을 반공 진영에 포섭시키는 대신 과거사 청산에는 관대했고, 군대 창설을 허용해줬던 상황은 2015년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현재는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고자 일본의 보통국가화에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일본이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기회를 틈타 아베 총리는 사상 첫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이라는 외교적 업적까지 이뤄내고 있다.

박준우 세종연구소 이사장은 3일 문화일보와의 통화에서 “소련에 이어 1949년 중국까지 공산화되면서 다급했던 미국은 아시아에서 제대로 된 우군을 만들기 위해 일본에 대한 전후 청산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박 이사장은 “현재 중국의 힘이 강해지면서 미국으로서는 동맹국의 힘이 필요한데 한국이 미국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이 일본이 약삭빠르게 미국과 접근하고 있는 상황과 아주 유사하다”고 말했다. 박 이사장은 “일본의 교묘한 전략에 휘말리지 말고, 미국이 한국의 편을 들어 주기를 기대해서도 안 되고, 한국외교가 지금 이 상황을 엄중하게 보고 주도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일본 우경화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단초를 제공했다는 데 공통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군대창설을 강력히 주장했던 당시 미 트루먼 행정부에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이 반대를 했지만 결국 미국 방위비 부담 감소를 위해 자위대 창설로 결론났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전문가들은 한계가 있겠지만 미국이 전략적 이익 극대화라는 실리 때문에 일본의 우경화를 또 용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방지하는 공세적 외교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일본사 연구 권위자인 존 다우어 매사추세츠공대(MIT) 명예교수도 아시아퍼시픽저널에 발표한 ‘샌프란시스코 체제’라는 글에서 “동북아의 영토분쟁, 일본 제국주의 과거사 문제 등은 모두 냉전 초기 미국의 전후질서 재편 방식에 고약한 뿌리를 두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명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이날 “미국이 이승만 대통령으로 하여금 일본에 배상금 요구를 못하게 했고,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를 사면 복권해 총리에 앉힌 이후 일본인들은 기시를 전범으로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연구위원은 “독일은 전후 히틀러의 추앙세력과 나치를 정당화했던 정치세력이 사라진 반면 미국 맥아더 군정이 천황제를 유지시켜 준 것이 오늘날의 일본 보수우익 역사관을 만들게 한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한 기시는 수감된 와중에도 냉전이 시작되기만 하면 자신이 구제받을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실제로 미국은 6·25전쟁 발발 2주일 만에 일본에 국가경찰 예비대 7만5000명과 해상보안청 요원 8000명을 증원할 권한을 부여한다고 통보했다. 일본 국가경찰은 1954년 자위대가 됐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일본의 군국주의가 다시 살아나게 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일본을 어떻게 재건시킬까 하는 데 방점이 있었지만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사실은 일본의 보통국가화를 위한 첫 출발로 악용됐다. 이 같은 맥락에서 미국이 독도 문제나 과거사 문제에서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는 분석이 있는 반면, 그런 만큼 “미국이 결자해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천황제를 유지시켜 준 것도 큰 패착으로 평가된다. 미 군정이 당시 전쟁의 실질적 책임자인 천황을 건드리지 않았던 것은 당시 급속도로 퍼지는 일본 공산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고, 일본 국민들의 천황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을 고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천황에게 전범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을 물리치기 위한 정치적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도쿄(東京)재판에서 히로히토(裕仁) 천황은 기소되지 않았다. 그 반대급부로 일본은 전쟁 포기와 군사력을 보유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평화헌법’을 가지게 됐다. 이제 아베 정권은 평화헌법 개정을 임기 중 최대 과제로 설정해 놓고 있다.

방승배·정철순 기자 bs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