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공간>월남민·피란민의 아픔 품어주고… 또다른 이주민 향해 품을 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범선의 ‘오발탄’ 속 배경인 해방촌은 말 그대로 해방 이후 피란민들의 정착을 위해 서울 용산구 용산동 2가 일대에 조성된 ‘달동네’였다. 지금은 아기자기한 커피전문점과 음식점들이 들어서면서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으나 가파른 언덕길에는 여전히 다가구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곽성호 기자 tray92@

45 이범선 소설 ‘오발탄’의 배경… 서울 ‘해방촌’

이범선의 ‘오발탄’(현대문학, 1959년 10월)은 “1950년대의 전후 상황을 총체적으로 드러내어 증언하고 있는 대표적인 고발문학”(조건상, ‘이범선의 오발탄과 전후문학적 성격’, 361쪽)이라는 평가가 보여주듯이 6·25전쟁 이후의 비참한 현실을 절규하듯이 고발하고 있는 소설이다. 북의 고향을 그리워하다 미쳐 버린 어머니, 계리사(회계사) 사무실 서기로 전차 값도 벌지 못하는 무력한 가장 철호, 상이용사로서 직업 없이 방황하다 권총강도로 내몰린 동생 영호, 양공주로 삶의 진창을 헤쳐나가는 여동생 명숙 등은 6·25전쟁 이후의 암담한 현실을 증언하는 대표적인 인간형이다. 이범선의 오발탄을 통해 추상적 무시간성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전후소설은 비로소 현실과의 접점을 조금씩 회복하게 된다.

철호가 사는 곳은 해방촌이다. 해방촌은 해방 이후 월남민과 피란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정부가 현재의 남산 서남 기슭 용산구 용산동 2가 일대의 국유림 42정보를 대부해 이들의 정착지로 삼게 한 것에서 비롯됐다.(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편,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출발’, 예맥출판사, 2004, 418쪽) 남산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해방촌은 일제강점기에는 전몰장병들을 기념하는 일본 신사(神社)만 위치한 산림지역이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해방촌에 남아 있는 하늘계단(혹은 108계단이라고도 불림)은 신사로 올라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넓게 보자면 해방촌은 광복 이후 서울에 생겨나기 시작한 달동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8·15광복과 6·25전쟁 이후 서울의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다. 해외에서 귀국한 동포들, 전쟁으로 인한 월남민과 피란민, 농촌의 피폐로 인한 이농민들의 유입 때문이었다. 이들은 하천 변이나 산비탈에 무허가로 판잣집이나 천막집을 짓고 살았다. 이들은 일거리가 주로 도심에 있었기 때문에 도심에서 멀리 벗어날 수 없었으며, 이로 인해 도심 주변 지역에 달동네가 형성됐다.(심승희 외, ‘서울스토리’, 청어람미디어, 2013, 35쪽) 해방촌 역시 이러한 달동네 중 하나이며, 강대진 감독의 ‘박서방’(1960), ‘마부’(1961) 등에서처럼 “서울의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의 삶을 압축해 놓은 대표적인 공간으로 설정”(변재란, ‘유현목 영화에서의 도시 서울 읽기’, 영화연구 49호, 2011, 165쪽)되고는 했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해방촌 108계단’. 위쪽이 해방촌, 아래쪽은 후암동이다. 해방촌은 일제강점기에는 전몰장병들을 위한 일본 신사가 있던 산림지역이었다. 곽성호 기자

오발탄에 형상화된 해방촌은 일종의 난민촌에 가깝다. 해방촌은 본래 월남민 중에서도 남한 사회에 성공적으로 편입하지 못한 “중·하층 사람들의 마을”(이신철, 월남인 마을 해방촌(용산 2가동) 연구, 서울학연구, 2000, 115쪽)이었다. 철호 가족의 삶이야말로 해방촌의 이러한 성격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곳은 최소한의 생활만이 가능한 생존 공간이며, 전쟁으로 실성한 어머니의 “가자”라는 외침이 상징하듯이 분단의 상처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산등성이를 악착스레 깎아내고 거기에다 게딱지 같은 판잣집을 다닥다닥 붙여 놓은” 해방촌의 풍경은 작품 속에서 다음처럼 묘사된다. “레이션 곽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 만치 비좁은 골목이었다. 부엌에서들 아무 데나 마구 버린 뜨물이 미끄러운 길에는 구공탄 재가 군데군데 헌데 더뎅이 모양 깔렸다. 저만치 골목 막다른 곳에, 누런 시멘트 부대 종이를 흰 실로 얼기설기 문살에 얽어맨 철호네 집 방문이 보였다.”

철호의 집 안이라고 해서 그 남루함이 덜하지는 않다. “걸레 썩는 냄새”로 가득한 철호의 집은 흡사 움막과도 같으며 그곳은 어둠과 시체의 이미지가 가득하다. 달랑 칸막이 하나를 기준으로 윗방과 아랫방으로 나뉘어 있으며, 윗방에서는 철호와 그의 아내 그리고 다섯 살 난 딸이 자고, 아랫방에서는 정신이상의 어머니와 장성한 영호·명숙 남매가 함께 잔다. 이 집을 밝히는 것은 오직 아랫방과 윗방 사이 문턱에 놓여서 “개똥벌레처럼 가물거리는 등잔”뿐이다. 등잔불은 그 좁은 집에 수많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며, 철호는 등잔불에 담뱃불을 붙이다가 머리카락을 태우기도 한다. 이 어두운 집안의 사람들은 모두 시체에 비유된다. 철호의 외모는 “송장”, 어머니는 “솜 누더기에 싸놓은 미라” “해골 같은 몸” “시체”, 만삭의 아내는 “몽유병자” 혹은 “무슨 둔한 동물”, 심지어 다섯 살 난 딸아이마저 “송장”에 비유되는 것이다.

오발탄은 역시 빼어난 소설답게 해방촌은 다른 공간과의 유기적인 연관 속에서 고유한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수직의 선을 따라 밤하늘, 해방촌, 거리라는 세 가지 공간이 설정된다. 철호는 저녁을 먹으면 집 뒤 산등성이에 올라가 밤하늘을 쳐다보고는 한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철호는 고향 마을을 눈앞에 떠올리는 것이다. 그 순간에는 “고향 마을의 좁은 길까지, 아니 그 길에 박혀 있던 돌 하나까지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다음으로 사무실, 경찰서, 병원 등이 위치한 서울의 거리를 떠올릴 수 있다. 이 거리는 전후의 냉엄한 현실 논리가 지배하는 곳이며, 이곳에서 철호는 패배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편소설이라는 한계로 인해 서울 거리의 로컬리티가 풍부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1961년 유현목 감독의 영화 오발탄은 영호를 핵심적인 인물로 부각시켜 서울 거리의 로컬리티를 풍부하게 살려내고 있다. 시끌벅적한 스탠드바 장면으로 시작된 영화는 공장, 철도, 현대식 주택 등이 다양한 촬영 기법을 통해 흑백 화면을 풍성하게 채워 주고 있는 것이다. 해방촌은 이상향으로서의 고향에 연결된 밤하늘과 냉엄한 현실 논리가 지배하는 서울 거리의 중간쯤에 위치한 곳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현실과 이상, 윤리와 욕망이 각축을 벌이는 곳이라고도 볼 수 있다. 등장인물과 관련시켜 보면, 밤하늘은 고향만을 그리워하다가 현실과의 연관을 잃어버린 어머니, 해방촌은 이상의 지향과 현실의 적응 사이에서 고민하는 철호, 서울 거리는 욕망과 현실의 논리에 충실한 영호와 명숙에 대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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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발탄에서 가장 중요한 갈등은 철호와 영호 사이에서 벌어진다. 철호는 이십오 환 전차 값이 없어 종로에서 집까지 십 리 가까운 거리를 걸어 다니지만 “가난하더라도 깨끗이 살자”는 인생관의 소유자다. 철호와 달리 영호는 “양심이고, 윤리고, 관습이고, 법률”을 벗어던지고 “폼 나게 한번 살아봅시다”는 입장이다. 둘의 대조적인 인생관은 철호가 피우는 국산 담배 파랑새와 영호가 피우는 빨간색 양담배를 통해 감각적으로 드러난다. 파랑새는 전후의 상처를 극복하고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희망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파랑새라는 이름을 달고 1955년에 출시된 담배였다.

그러나 철호와 영호의 대비가 그리 선명한 것은 아니다. 영호는 폼 나게 살기 위해 권총강도질을 하지만, 결국 범죄의 목격자를 살려 두는 바람에 검거된다. 영호는 자신이 부정했던 “인정선(人情線)”에 걸리고 만 것이다. 나중에 철호가 위험하다는 의사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이를 두 개나 뽑아 혼절 상태에 이르는 것은 양심, 윤리, 관습, 법률만으로는 지탱할 수 없는 삶의 냉혹한 실상을 인정한 행동이라고도 볼 수 있다. 철호는 을지로 입구에서 명숙이 미군과 지프에 같이 타고 있는 모습을 본 이후로 명숙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는다. 그러나 출산하다가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 아내를 찾아갈 때의 병원비는 결국 명숙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철호가 강조한 양심, 윤리, 관습, 법률은 결코 삶의 논리를 뛰어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해방촌이라는 명칭은 너무도 분명한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해방이라는 이름이 가진 본래의 의미와 달리 철호 가족이 살고 있는 해방촌은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삶의 근거를 송두리째 빼앗긴 사람들의 보금자리이기 때문이다. “해방촌이 이름 그대로 해방촌(解放村)일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아이러니는 어머니와 철호가 내지르는 “가자”라는 말에서 발생한다. 실성한 어머니의 외침은 이 단편소설 전체에서 23번이나 반복해 울려 퍼진다. “가자”는 정신이상이 생기기 전부터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되풀이하던 말이며, 이 외침은 철호의 말마따나 “고향으로 돌아가자”와 “옛날로 되돌아가자”는 분명한 의미를 담고 있다. 마지막에 어금니를 두 개나 뽑아 와이셔츠를 흥건하게 피로 적신 철호는 어머니가 그랬듯이 택시기사에게 “가자”고 외친다. 그러나 정신 나간 어머니가 외치는 “가자”에는 분명한 지향점이 있지만, 정신이 온전한 철호가 외치는 “가자”에는 지향점이 없다. 철호의 공허한 외침은 전후의 혼란과 그 속에서 삶의 작은 방향이라도 찾고자 하는 소시민의 처절한 비명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가자” 소리와 온갖 빈곤의 풍경으로 가득했던 1950년대의 해방촌은 지금 새로운 모습으로 분주하게 탈바꿈하고 있다. 최근에는 지방자치단체와 주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예술마을, 빈집 주거공동체, 빈 공작소, 종점 수다방, 해방촌 축제와 같은 새로운 지역 모델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중이다.(공윤경, 해방촌의 문화 변화와 공간의 지속가능성, 한국사진지리학회지, 2014, 26∼35쪽) 또한 해방촌은 반포동 서래마을, 이촌동 리틀 도쿄, 가리봉동 연변거리 등처럼 특정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이는 마을과 달리 다양한 국적·종교·문화의 외국인들이 함께 어울리는 진정한 다문화 공간으로서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태원에서 해방촌으로 진입하는 ‘리틀 이태원 거리’에는 다양한 외국인과 이국적인 음식점이 가득하다. 그러고 보면 태생적으로 이주민에 의해 형성된 해방촌은 2016년 지금도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이주민들을 향해 그 품을 활짝 열어 놓고 있다. 월남인들, 지방 출신의 서민들, 미군기지의 미국인들에 이어 비정규직 이주 노동자들이나 단기 체류자들처럼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은 외국인들을 새로운 주민으로 맞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용산동 2가 해방촌은 아이러니로서의 해방촌이 아닌 고유성과 보편성이 공존하는 문자 그대로의 해방촌이 돼 가는 중이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