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말로 요리한 ‘밥상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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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음식의 언어 / 한성우 지음 / 어크로스

소설가 김훈이 2003년 ‘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산문집을 내놨을 때 많은 이들이 이 문구에 열광했다. 열광이라기보다는 밥벌이 전선에 나선 이들의 공감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그 뒤 이는 끊임없이 인용되는 전설적 문구가 됐지만 사실 이 말은 밥벌이의 지겨움이 아니라 밥벌이의 엄숙함, 혹은 그 신성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밥벌이가 때론 지겹고, 피할 수 없기에 더더욱 지겹지만 그래도 성실히 밥벌이하고, 밥벌이를 통해 도덕과 인격을 완성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밥벌이는 노동과 일이며 노동을 통해 먹고살아 가는 우리 삶이기도 했다. 우리는 또 ‘먹고살기 힘들다’는 말도 흔히 한다. 그냥 살기 힘들다고 하면 될 텐데 굳이 ‘먹다’를 붙인다. 먹는다는 것이 곧 사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20여 년 동안 중국, 러시아, 일본을 넘나들며 우리말을 연구해온 중견 국어학자 한성우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의 ‘우리 음식의 언어’는 이런 밥, 이런 먹거리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이다. 저자의 인문학적 고찰이라는 카테고리에는 두 갈래가 서로 탄탄하게 연결돼 있다. 하나는 국어학자답게 음식을 주제로 음식 관련 말들의 어원은 무엇이며, 어떻게 변해 왔는지 등을 살피는 한글학적 분석이다. 다른 한 갈래는 음식에 담긴 혹은 음식이 드러내는 풍속, 문화, 생활사, 문화 교류사를 좇는 음식 인문학이다. 음식에서 출발해 그 언어를 살피고, 이들을 통해 ‘우리’를 알아보는 작업이다.

책의 순서는 밥에서 출발해 면, 국·찌개, 반찬, 음식 재료인 채소·과일, 후식, 술로 이어지다 음식을 만드는 공간인 부엌에서 마무리된다. 애주가에겐 밥보다 술이 중요할 수 있고 채식주의자에겐 채소가 밥이기도 하지만 통상적으로 한국 음식에서 중요한 순서대로 밟아 나간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고 했듯이 역시 밥이 먼저다. 우리에게 밥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영어와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밥을 영어로 표현하면 rice. rice는 쌀을 뜻하기도 한다. 벼가 자라 밥상의 밥으로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단계와 이를 칭하는 단어가 있는데라고 생각하면 rice는 굉장히 불친절한 단어이다. 밥이 주식이 아니니 그들의 rice와 우리의 밥이 같은 무게일 수는 없다. 한국인에게 밥이 갖는 압도적 위상은 ‘밥을 짓다’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음식은 ‘만들다’란 동사를 쓰지만 밥은 짓다가 제격이다. ‘짓다’는 집, 옷, 배, 매듭, 이름 등 훨씬 좁은 영역의, 중요한 대상에게 쓰이는 단어이다. 또 방언을 아무리 뒤져도 한국 땅 어디에서나 밥은 밥일 뿐, 방언이 없다. 물론 ㅂ이 기본 자음에 속하고 모음 ㅏ 또한 기본 모음이며, 한 글자 단어에서는 변이가 일어날 가능성이 적기도 하지만 원래 밥은 모든 지역에서 기본 중의 기본이었으니 변이가 일어날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밥의 높임말은 진지, 임금님의 밥은 수라. 진지는 한자어일 것 같은데 고유 우리말이며, 수라는 몽골어 ‘슐라’에서 유래된 말로 고려가 원나라 지배를 받던 시절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 같은 한글학적 분석이 끝나면 저자는 언어의 울타리를 넘어 인문의 세계로 들어간다. 저자는 1942년부터 최근까지 한국인의 밥그릇 평균 크기를 비교하며 한국인의 식습관 변화를 보여주고 가정식 백반, 집밥, 혼밥 등을 통해 시대 변화를 훑어낸다. 음식 문화사적 측면도 건드린다. 우동, 라면, 짬뽕 등이 한·중·일 삼국을 어떻게 돌고 돌아 자국 음식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설명하는 식이다. 예를 들어 우동은 중국어 훈둔(混鈍)에서 시작됐다. 훈둔은 얇은 밀가루 피에 고기소를 넣어 찌거나 끓인 음식인데, 이것이 일본으로 전해져 온동(溫鈍)으로 불리다 우동이 됐고 다시 한국에 건너와 우리들이 즐기는 메뉴로 자리 잡았다. 훈둔은 본래 만두와 비슷한 음식이었지만 이름만 살아남아 국수의 일종이 됐다. 기스면은 닭 국물에 실처럼 가는 국수를 넣은 면이라는 뜻의 중국 지쓰？(鷄絲麵)이 곧바로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표준 중국어 발음대로라면 지쓰？인데 기스면이 된 것은 한국에 들어온 화교들 중 상당수가 산둥(山東)성 출신이기 때문이다. 산둥성 사투리에선 ‘지’ 발음이 ‘기’이다 보니 기스면이 됐다는 것이다. 닭을 튀겨 만든 깐풍기의 기도 마찬가지 결과이다.

이렇게 책은 음식을 중심으로 언어 분석과 문화·문명사까지 드나든다. 하나하나 전문적으로 깊이 들어가기보다는 지적 수준을 적절히 유지하면서 대중적 흥미를 놓치지 않는 적정선을 잘 유지한다. ‘쿡방’ ‘먹방’이 대세이고, 모두가 셰프이고 미식가인 시대에 우리가 이토록 사랑하는 음식에 대해 조금 알아보는 것, 그게 인생의 놓칠 수 없는 맛이 아닐까 한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