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소통령’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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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 정치부장

#1. 과감한 개혁 정책으로 국정 지지율 90%대까지 올랐던 김영삼정부가 나락으로 떨어진 데는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의 국정농단이 한몫을 했다. 현철 씨는 청와대와 사정기관에 자신의 인맥을 배치해두고 핵심 국정 현안을 보고받았다. 김 전 대통령의 각별한 애정에 정보까지 장악한 현철 씨의 권력이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인사 청탁에 충성 맹세를 하는 정치인과 고위공직자들이 줄을 이었다. ‘소통령’으로 불렸지만 김 전 대통령은 관련 보고를 받지 못했다. 현철 씨는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민주화 투쟁 동지에 대선 1등 공신이었고 비선 라인이었다.

박근혜정부가 지난 21일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취임 후 최저치인 25%의 지지율을 보인 것은 최순실(60) 국정개입 의혹 사건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800억 원대의 기금을 순식간에 거둔 미르·K스포츠재단 미스터리에다, 최 씨 딸 특혜 의혹으로 이화여대가 130년의 역사에서 최대 수모를 당하는 일까지 생겼다. 더구나 최 씨의 딸과 관련된 사안을 조사한 문화체육관광부 국장 등이 퇴출된 의혹에 이르면 ‘소통령’을 넘어선 느낌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제대로 된 보고를 받은 정황은 없다. 40년 가까이 박 대통령을 ‘그림자 내조’해 온 것으로 알려진 ‘최순실’은 해리 포터의 ‘볼드모트’처럼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금기어였다.

#2. 집권 2년 차에도 ‘소통령’ 논란이 계속되자 박관용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현철 씨 문제를 제기했다. 홍인길 총무수석은 “대통령에게 절대 현철 씨에 관해 말하면 안 된다. 애정이 대단하다”며 한사코 막았다. 그러나 6개월 뒤 박 전 실장은 김 전 대통령에게 “지금 현철 씨 부탁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고 한다.… 각하 일을 추진하는 데 큰 누가 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김 전 대통령은 듣고만 있었다. 1주일 뒤 박 전 실장은 현철 씨로부터 항의성 전화를 받았고 1994년 말 이뤄진 개각 및 청와대 개편 때 비서실장직에서 물러났다.

지난 2014년 4월 초 최 씨 남편 정윤회 씨가 문고리 3인방을 통해 국정을 좌지우지했다는 의혹을 담은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이 불거졌다. 검찰이 청와대의 고소에 따라 그해 11월 수사에 착수했지만 최 씨 행보는 여전히 거침없었다. 수사를 전후해 최 씨 딸은 ‘맞춤형 입시요강 변경’ 덕에 이화여대 수시에 합격했고, 문제의 재단과 재단 기금 유용 의혹 등을 받고 있는 ‘더블루K’가 잇따라 설립됐다. 지난달 20일 최 씨 관련 의혹이 다시 제기됐지만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들”이라고 일축했다.

#3. 김 전 대통령 임기를 1년여 남겨둔 1997년 1월 한보그룹이 부도처리되면서 현철 씨의 행보에 제동이 걸렸다. 야당이 한보철강 설비 도입 리베이트 관련 의혹을 제기하면서 검찰이 수사에 나선 것. 사정기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현철 씨는 1개월 만에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뒤이어 모 언론사 사장 인사에 개입하는 내용을 담은 녹화테이프가 폭로되면서 결국 구속됐다.

임기를 1년 4개월여 남겨둔 지난 20일 박 대통령은 “누구라도 재단 자금 운용 등 불법행위를 했다면 엄정히 처벌받을 것”이라며 처음 최 씨의 문제점을 언급했다. 가이드라인으로 비치는 데다 최 씨 등이 이미 해외로 출국한 뒤여서 ‘면죄부 수사’ 우려가 없지 않다. 그러나 ‘소통령의 몰락사’가 보여주듯 진실과 민심을 막을 수는 없다.

온갖 내부 비리에다 구부러진 칼로 비판받는 검찰이 시험대에 올랐지만, 본질은 청와대 참모진이다. 박 대통령과 국민의 인식 사이의 괴리는 무능해서든 비겁해서든 참모들이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렸기 때문이다. 특히 대통령 측근 비리를 감시·견제해야 할 우병우 민정수석은 당장 사표를 내도 직무유기의 정치적 책임을 피할 수 없는데 국회 증인출석 요구까지 묵살했고, 이원종 대통령비서실장은 국회의 거듭된 요구에 ‘세상이 달라졌다’며 오히려 우 수석 눈치를 보는 모양새다. 오죽하면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우 수석 사퇴를 건의했다”고 공개하고, 정진석 원내대표는 “대통령과 관련한 흉흉한 풍문을 가리는 게 민정수석인데, 제 직무를 수행하지 않고 있다”고 했겠는가. 이런 비서실을 전면 교체하지 않으면 박 대통령은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지키는 소임을 다하겠다’던 거듭된 약속을 지킬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