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미래를 보다>최희서 “소모적 배역·고정관념에 갇힌 역할 안할 것”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배우 최희서(오른쪽)는 영화 ‘박열’에서 강한 신념을 지닌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여배우 氣살리기
- ‘박열’서 신념있는 日여인 열연한 최희서

이준익 감독의 신작 ‘박열’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심장부인 도쿄(東京)에서 제국주의에 저항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박열의 기개를 그린 영화다.

28일 개봉하는 이 영화는 1923년 일본 간토(關東) 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을 배경으로, 일본 정부가 벌인 계략에 맞서 목숨을 건 재판을 진행한 박열과 그를 사랑한 일본 여인 가네코 후미코의 꿋꿋한 신념을 담았다.

일본 정부는 대지진 이후 폭동 조짐이 보이자 민심을 돌리기 위해 조선인에 대한 괴소문을 유포한다. 이에 일본인의 조선인 학살이 자행되자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조선인 아나키스트 단체인 ‘불령사’를 조직해 활동하던 박열에게 대역죄를 뒤집어씌워, 그를 재판정에 세운다. 이에 박열은 대학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스스로 일본 황태자 암살 사건 계획을 자백하고,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사형을 무릅쓴 공판을 시작한다. 박열 역은 배우 이제훈이 맡았으며 이 감독의 전작 ‘동주’ 후반부에 쿠미로 등장했던 신예 최희서(사진)가 가네코 후미코를 연기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박열이지만 영화의 맛은 대부분 가네코 후미코가 살려준다. 강한 신념과 뜨거운 사랑으로 박열을 지지하는 여인의 모습이 통쾌한 쾌감과 진한 감동을 안겨준다.

이 감독은 이 중요한 배역을 왜 신인급 여배우에게 맡겼을까. 이에 대해 이 감독은 최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누구나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 의욕을 키운다. 실력을 키워야 할 시간에 의욕만 키우는 누를 범하는 것”이라며 “최희서는 의욕에 빠지지 않고, 실력을 키운 준비된 배우다. 또 일본어 대사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배우”라고 극찬했다.

이 감독과 최희서의 만남은 필연이라 할 수 있다. ‘동주’ 제작자인 신연식 감독이 우연히 지하철에서 연극 대본을 읽고 있는 최희서를 발견했고, 그가 일본어를 잘한다는 걸 안 후 이 감독에게 소개했다.

최희서는 문화일보와 만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2009년 ‘킹콩을 들다’에 출연(역도 소녀 5인방 중 여순 역)한 후 8년 넘게 이렇다 할 작품을 만나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시 학교(연세대)에 복학해, 연극동아리 무대에 오르고 있었죠. 매일 지하철을 타고 연습실에 가며 대본을 외웠어요. 싸우는 장면이라 저도 모르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대사를 외우고 있었나 봐요. 그 모습을 신 감독님이 보시고, 제게 명함을 주셨어요. 초등학생 때 가족과 함께 일본에서 살며 한인학교를 다녀 일본어를 잘할 수 있었고요.”

‘중고 신인’인 그가 포기하지 않고, 연기의 끈을 잡고 있었던 동력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오디션에서 떨어졌지만 매번 ‘다음에는 뭘 하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다른 친구들보다 좀 긍정적이라 쉽게 주저앉지 않았던 것 같아요. 또 제 자신에 대해 꽤 믿는 구석이 있거든요(웃음).”

가네코 후미코 캐릭터가 당당하게 그려진 건 최희서가 이 인물과 닮았기 때문이다. 기교 없이 자연스럽게 캐릭터를 표현한 것이 영화의 진정성을 잘 살렸다.

“저도 여성으로서 차별당하거나 무시당할 때 분명히 저항을 하거든요.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싶다는 욕망이 제 안에 있어요. 시나리오를 통해 후미코를 처음 접했을 때 제 안에도 후미코의 뜨거움이 있다고 느꼈어요. 그걸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숙제였죠. 이준익 감독님께 ‘이 영화 꼭 만들어주세요’라고 부탁했어요.”

일어와 영어, 그리고 이탈리아어까지 구사하는 그는 여배우의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는 충무로 상황을 직접 깨보겠다고 다짐했다.

“오디션에 가면 90%는 ‘그 학교 나와서 왜 연기를 하려 하느냐’고 물어요.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포털사이트에서 학력을 삭제했고, 사람들이 제 본명(최문경)이 ‘공부 잘할 것 같은 이름’이라고 해서 예명으로 바꿨어요. 그러면서 사명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앞으로 계속 주연으로 나설지, 작은 배역을 맡을지는 모르지만 스테레오 타입에 부응하는 여성 역할은 하지 않을 거예요. 단순히 소모되는 배역도 거부할 거고요. 후미코처럼 제 신념대로 배우의 길을 갈 거예요. 험난한 길이겠지만 배우로 제대로 쓰이기 위해 그런 판단을 계속해야겠죠.”

글·사진 = 김구철 기자 kc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