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즉위 600돌인 올해는 세종과 관련해 많은 일이 있었다. 그중 의미 있는 일로는 경복궁 영추문 개방을 꼽을 수 있다.
이달 초 43년 동안 닫아뒀던 영추문을 개방하면서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주민과 관람객의 편리’를 강조했다. 관리의 수월함보다는 국민의 편리를 중시한 문화재 정책의 전환이라고 생각한다. 영추문 개방이 의미 있는 것은 비로소 ‘한글 길’ 조성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경복궁 사정전에서 출발해 흠경각을 지나 집현전 앞길과 영추문을 통과해서, 세종 나신 곳(종로구 통의동)까지 연결하는 ‘한글 길’은 많은 사람의 숙원이다. 경복궁을 찾는 수많은 외국인과 청소년들에게 세종과 한글 이야기를 훨씬 생생하게 전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한글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꼭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 지금은 흔적도 남아 있지 않지만, 사정전과 경회루 사이에 있었던 작은 억새풀 띠집이 그것이다. 재위 3년째인 1421년 5월 7일에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하면서 세종은 강녕전으로 들어가지 않고, 뜻밖에도 경회루 동편에 초라한 띠집을 짓게 했다. 계속되는 가뭄과 역병 때문에 고통받는 백성과 아픔을 함께하기 위해 그곳에서 결재와 기거를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세종은 경복궁으로 옮기기 전에 버려둔 재목을 이용해 경회루 동편에 별실(別室) 두 칸을 짓게 했다. 기록을 보면 그 띠집은 “주초(柱礎)도 쓰지 않고, 띠(茅草)를 덮어 만들었다”고 한다. 어느 날 띠집에 들어가려던 세종은 그 아래에 짚자리(藁席)가 있음을 발견했다. 왕의 잠자리가 너무 열악하다고 생각한 신료들이 왕 몰래 바닥에 짚을 넣었던 것이다. 세종은 집 바깥에 서서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게 묻지도 않고 어찌하여 이런 것을 만들었느냐. 지금부터는 내가 말한 것이 아니면, 비록 작은 물건이라도 안에 들이지 말라.(세종실록 3년 5월 7일)
실록을 보면 당시 세종은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이었다. 그는 왕비 가문이 파탄이 나도 발언 한마디 못 하고 밤늦게까지 부왕을 따라 연회에 참석해 춤을 춰야 하는 무기력한 남편이었다. 계속되는 가뭄으로 백성은 굶주림을 면치 못했고, 제주도로 곡식을 실어 보낸 배가 난파됐다는 소식이 무려 한 달이 지난 뒤에야 들려왔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바로 이런 상황에서 세종이 취한 조처가 경복궁 띠집 기거였다. 가정에서도, 조정에서도 무기력하기만 하다고 느낀 그는 모든 기대가 다 무너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로 그곳에서 자신을 묵묵히 내려놓았다.
백성의 소리를 가장 가깝게 들을 수 있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로 들어간 것이다.
나랏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일터에서 일이 잘 안 풀릴 때, 그리고 가정이 파탄 날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때 영추문으로 걸어 들어가 경회루 서쪽에 앉아, 멀찌감치 있었을 세종의 띠집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세종이 바닥을 치고 올라갔던 그곳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생기를 재충전하는 세밑이 되기를 바란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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