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고방오리 떼와 큰고니가 찾은 주남저수지. 황선미 작가는 백과사전 속 주남저수지를 보며 ‘마당을 나온 암탉’의 공간을 상상했다. 자료사진
황선미 ‘마당을 나온 암탉’ 속 저수지
아버지의 투병에 무능력
맏자식 자존감 바닥일 때
이웃집 아이가 읽던 만화
TV 속의 토종닭서 ‘영감’
저수지에 대해선 잘 몰라
변산의 물웅덩이와 둠벙
주남저수지 이미지 혼합
애니선 우포늪으로 표현
유년기 고향집의 닭장과
집 건너편 양계장도 참고
‘마당을 나온 암탉’을 집필할 당시는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 참 어려운 즈음이었다. 궁색하고 불안하고 일종의 죄책감도 좀 있었다. 그럼에도 낱말을 감각적으로 주워 먹는 듯하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니 소재 단계부터 출간까지 내적 갈등을 겪은 과정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첫 책을 내자마자 지인 하나도 없는 전라도 광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연달아 책 세 권을 냈으나 수입이랄 게 없는 때였다. 글을 쓴다는 건 애당초 나를 확인하는 내밀한 습관일 뿐 그것으로 주머니를 채워 볼 요량은 없는 숙맥이었건만 집안의 기둥 같던 아버지가 병석에 들고 보니 변변한 월급 한번 받아본 적 없는 맏자식의 처지가 한심하기만 했다.
늦은 밤이나 새벽에 울리는 전화 소리 자체가 두려움이었다. 광주에서 평택까지는 너무 멀고 아이들도 어렸으니 무능력이 죄스럽고 뭘 써 보려 해도 집중할 수가 없어서 자존감도 바닥이었다. 그나마 말이 통하던 이웃을 찾아갔던 그날은 막막하던 속내에 숨구멍이 트이던 날이 아니었나 싶다. 이런 소재를 얻었으니 운명이나 행운이라고 할 수밖에. 그 집 아들이 읽던 만화책을 무심코 집어 들었는데 거기서 그 주제를 만났다. ‘길든 오리는 자기 알을 품을 줄 모른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마당을 나온 암탉’ 애니메이션에서 배경으로 등장한 우포늪. 자료사진
만화 이미지나 전체 스토리가 어떻게 흘렀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 짧은 만화에서 걸러진 메시지만 강렬하게 남았다. 내가 내용을 제대로 봤는지 혹시 착각을 했는지 의문이지만 어쨌든 그건 내 것이었다. 일이 참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 며칠간이 그랬다. 무심코 보던 채널에서 토종닭에 대한 낯선 정보까지 얻은 것이다. 닭과 오리를 풀어놓고 기르는 노인이 ‘어미 닭이 알을 품어야 할 때’ 나타나는 몸의 변화에 대해 설명하는데 그게 퍽 흥미롭고 낯설었다. 노인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이야기를 웃으며 들려주었고 리포터는 그저 과장된 반응으로 넘어갔으나 역시 그 순간은 내 것이 되었다.
책을 좋아하고, 끄적거리기의 재미를 엔간히 안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때의 감각은 그런 것과 좀 달랐다. 두 가지가 충돌하는 듯했으니. 닭과 오리가 내 머리와 꿈속까지 점령해버려서 나는 쓰지 않을 수 없었다. 1998년 하반기, 그해 첫 작업이었다. 나는 암탉에게 빠져들어 굶주린 배를 채우듯, 낱말을 야무지게 주워 먹듯이 ‘쓴다는 것’의 희열을 느꼈는데 동시에 뼈가 앙상해지고 있는 아버지를 떨칠 수가 없어서 ‘너는 이런 지경에도 기쁠 수 있구나’ 하는 자책감으로 가슴이 저렸다. 글을 쓴다는 게 때로는 제 살을 파먹는 일임을 그때 알았다.
노인이 설명하며 보여주던 마당과 들판과 물웅덩이를 꼭 보고 싶었다. 원고를 쓰기 전에 한 번은 눈으로 확인하고 어떻게 느껴지는지 겪어보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방송국에 연락해서 그 노인을 만나고 다른 어디도 아닌 바로 그 노인의 공간을 둘러보고 싶었다. 그러나 가당치도 않을 노릇이고 그 비슷한 환경을 찾아 취재랍시고 훌쩍 떠날 상황도 아니었다. 그럴 주변머리도 돈도 여유도 없었고 식구 누구도 내가 하는 일이란 그저 좋아서 하는 취미일 뿐 마트의 계산원보다 영양가 있다고 봐주지 않는 처지였다. 그러지 못할 이유는 사실 내 속에 있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도 있는데 취재랍시고 그러는 건 너무나 미안한 일이고 사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이야기를 빨리 써내고 싶은 충동이 모든 걸 해 냈다.
오리 떼가 자유롭게 유영하고 주인공 잎싹이 자식을 키우는 저수지라는 공간. 이 공간은 상상으로 그려낼 수밖에 없었다. 내 주변에서는 마당도 들판도 고스란히 따 올 곳이 없었다. 나는 구획정리가 된 신도시 아파트에 살았고 근처 호수도 도시계획으로 조성된 곳이었다. 아쉬운 대로 그곳으로 산책을 자주 나갔다. 변산 쪽으로 가다가 작은 물웅덩이를 발견했을 때 가장자리의 마른 풀을 만져보고 걸으며 소리를 느껴본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저수지에 대한 유일한 구체적 경험이었다. 공간 형상화를 위해 최대한 활용한 것은 어린이용 백과사전과 아파트 건너편 8차로 너머에 있는 양계장이었다. 유년기 고향 집에 있던 닭장 기억도 구체화시켰다.
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게 궁금하거나 이야기가 풀리지 않을 때마다 나는 작은 바구니를 들고 8차로 너머 양계장으로 갔다. 그러면 달걀을 사면서 은근슬쩍 궁금한 것들을 물을 수 있었고 양계장 내부며 주변을 눈으로나마 스케치할 수 있었다. 오가는 길에 덤으로 논 가운데의 ‘둠벙’을 멀리서나마 볼 수 있었고 털북숭이 잡종 삽살개도 눈여겨보았다가 캐릭터로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마당을 나온 암탉’의 저수지는 변산 초입 어디쯤에 있는 이름 모를 물웅덩이와 논 가운데 ‘둠벙’과 백과사전 속 주남저수지 이미지의 혼합인 셈이다. 그게 애니메이션에서 우포늪으로 확장되었을 때 나의 궁색한 경험에 비해 어찌나 화려하던지 어울리지 않는 옷을 껴입기라도 한 것처럼 부담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원작이 다른 콘텐츠로 변주될 때의 해석이란 사용자의 이해에 달렸고 감독은 책 속의 저수지를 우포늪의 사계절로 담아내고 싶었다고 하니 이 부분은 관여할 일이 아니다. 감독이 청둥오리들의 레이스 장면을 길게 설정한 지점에서는 우포늪을 벗어나는 공간 확장으로 보일 정도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황선미 작가·서울예대 교수
이 작품의 공간 배경이 구체적으로 있었다면 무엇을 더 담아낼 수 있었을까. 그런 곳이 있다면 내가 어려울 때마다 찾아갈 곳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좋았을 걸, 어째서 내게는 그 정도의 낭만도 허락되지 않는지. 들짐승이 해코지라도 할까 봐 뒷방에 풀어놓았던 햇병아리에 대한 유년기 기억은 너무나 단편적이고 고향 집 닭장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작은 바구니를 들고 찾아가던 첨단지구 건너편도 위성사진으로 보니 예전 그대로가 아니다. 초록 부분이 좀 보이기는 하던데 혹시 물길이 살아 있던 ‘둠벙’은 남아 있을까. 갈증을 풀고자 오가던 길이 사라졌을까 봐 그때의 길조차 머리에서 사라질까 봐 차마 더 이상은 확인을 못하겠다.
이 작품에서 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던 공간 결핍의 문제를 내 방식대로 해결했다. 겨우 몸 하나 정도의 철망 속에서 생산이 끝날 때까지 살아야 했던 암탉을 마당으로 내보냈고 거부하는 마당의 집단을 뒤로하고 들판으로 가게 했으며 자신에게 날개가 있음을 비로소 알고 날아가게 만들었다. 최소한의 정보를 기반으로 이런 구조를 상상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역시나 결핍이었다. 평생 우리에게 헌신했으나 시인의 감성을 가졌던 내 아버지. 잎싹의 모델이었던 아버지의 비상을 나는 현실에서 어찌 하지 못하고 겨우 이렇게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잎싹은 딸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헌사에 다름 아니다.
황선미 작가·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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