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정의 에로틱 시네마>마약·섹스·죽음… ‘펑크의 시대’ 기괴하고도 처연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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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드와 낸시

1970년대식 ‘세기의 사랑’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섹스 피스톨스의 베이시스트 시드 비셔스와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그루피(록그룹에 열중하는 10대 팬) 낸시 스펑겐이다. 다만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비극의 요체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집안싸움도, 이수일과 심순애를 갈라놓은 돈도 아닌 헤로인이라는 점은 197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 특히 펑크 음악과 문화가 권태에 찌든 전후 세대를 집어삼킨 시기의 단면을 역설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앨릭스 콕스 감독의 1986년 작 ‘시드와 낸시’(사진)는 마약과 섹스에 중독된 한 커플의 만남부터 죽음까지의 짧은 기간을 그린 영화다. 막 부상하기 시작한 펑크밴드 섹스 피스톨스의 베이시스트인 시드(게리 올드먼)는 그만의 독특한 패션과 기행으로 펑크의 아이콘이 됐다. 시드가 가는 곳마다 그와 밤을 보내고 싶어 하는 여자들이 들끓지만 정작 그는 술과 어처구니없는 장난에만 관심이 있다. 그런 아이 같은 시드 앞에 낸시(클로이 웹)가 나타난다. 시드의 밴드를 쫓아다니던 여자의 집에서 만난 낸시는 심한 마약 중독에 밴드를 하던 주변 남자들에게 무시당하는 별 볼 일 없는 여자애다. 시드는 그런 낸시에게 마약을 사다 달라는 부탁을 하고 낸시는 약속 시간이 지난 지 하루 만에 나타난다. 밤새 낸시를 기다린 시드는 그녀에게 욕설을 퍼붓다가 갈 곳 없이 떠도는 낸시에게 연민을 느낀다. 밴드 멤버와 그루피들이 약에 취해 섹스하는 것을 경멸했던 시드는 처음으로 낸시와 밤을 보낸다. 물론 그들처럼 약에 취해 하는 섹스라는 점은 같지만 시드는 낸시를 걷잡을 수 없이 사랑하게 된다. 처음 만난 날 이후로 며칠간 시드와 낸시는 방에 박혀 섹스와 약에만 몰두한다. 섹스 피스톨스의 멤버들에게는 낸시의 등장이 반가울 리 없다. 낸시에게 빠진 이래로 시드는 공연과 밴드 연습을 밥 먹듯 빼먹기 시작하고, 간신히 기어 나오는 날에도 약에 찌들어 인사불성인 상태다. 그렇게 밴드 멤버들과 불화가 계속되고 결국 전설의 섹스 피스톨스는 활동한 지 3년 만인 1978년에 해체하게 된다.

영화의 제목인 ‘시드와 낸시’가 암시하듯, 영화는 섹스 피스톨스의 흥망성쇠가 아닌 두 연인에게 초점을 맞춘다. 영화의 후반부는 밴드를 떠난 시드와 낸시의 뉴욕 생활을 담는다. 저명한 아티스트들이 머물고 있던 뉴욕의 첼시호텔에서 새 생활을 시작한 그들은 근근이 시드의 공연비로 연명하지만 헤로인 중독은 점점 더 심해진다. 특히 낸시는 자살 충동에 시달리기 시작하고, 약에 취할 때면 시드에게 동반 자살을 요구한다. 시드의 중독으로 공연마저도 힘들어질 때 즈음, 결국 이들에게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함께 약을 하고 깨어났을 때, 낸시가 본인의 칼에 찔려 죽어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시드는 낸시 살해범으로 지목되고 이후 보석으로 풀려난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효정 영화평론가

콕스 감독의 ‘시드와 낸시’는 시종일관 기괴하고 불안한 사랑 이야기를 보여주면서도 영화의 엔딩에서만큼은 인류에게 길이 남을 처연한 장면을 선사한다. 감옥에서 나온 시드는 황량한 맨해튼 어딘가에 위치한 한 폐건물로 향하고, 그곳에서 흑인 아이 무리와 함께 춤을 춘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아이들과 어울리던 시드 앞에 노란 택시가 선다. 택시 안에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낸시가 있고, 이들이 환희의 키스를 나누며 영화는 끝이 난다. 물론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낸시 살해 혐의로 재판을 앞둔 시드는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한다. 낸시는 열아홉 살에, 시드는 스물한 살에 삶을 마감한 것이다. “빠르게 살고 젊은 상태로 죽어라(Live fast and die young)”라는 당시 펑크운동의 슬로건을 몸으로 실천한 셈이다.

이 영화는 젊은이들의 분노에 대한 이유나 명분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대마다 존재했던 성난 젊은이의 한탄일 수도, 혹은 1960년대 말, 그리고 1970년대를 관통하는 반전운동과 반권위운동의 또 다른 버전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시드와 낸시의 사랑이 그간 세기의 사랑들처럼 죽음이라는 비극을 맞음에도, 이들만큼은 그 어떤 권위에도 순응하거나 희생당하지 않은 유일무이한 아이콘이 됐다는 사실이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