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ifty+ >3500개 돌 홀로 쌓으며… 황혼기에 세운 ‘자유의 城’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경수 씨가 지은 집의 내부는 구조가 독특하다. 전체적으로 천장이 까마득하게 높은 통층 구조라 개방감이 뛰어나다. 비행기 트랩 같은 계단을 오르면 2층 침실 겸 서재다. 어두운 실내로 창을 통해 볕이 조명처럼 들어오도록 설계해 아늑한 분위기다. 김 씨는 여기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타국 생활 30년 만에 귀촌한 김경수 씨

탄탄대로 교수의 길 포기하고
건축설계사업에 바쳤던 청춘
은퇴후 제2의 인생 위해 귀국

환갑에 45㎏짜리 석재 나르며
2년간 고행하듯 지은 보금자리
힘들어도 스트레스 받은적 없어

골프채 대신 테니스 라켓 잡고
산악 자전거 타며 클래식 감상
소소한 행복속 진정한 삶 찾아

경북 상주시 이안면 구미리. 작약산 발치 아래 작은 마을의 구릉에 난데없이 유럽풍 석조건물이 있다. 어찌 보면 유럽의 고성(古城)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수도원 같기도 한 집이다. 이 집은 30년 미국 생활을 접고 은퇴한 뒤 고국으로 돌아온 김경수(65) 씨가 혼자 힘으로 손수 지은 집이다. 그가 고행처럼 홀로 지은 집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새겨져 있다. 그에게 이 집은 오랜 타국 생활 끝에 은퇴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징표이기도 하고, 은퇴 이후 노년의 즐거운 삶을 시작하는 기념비이기도 하며, 늦은 이혼 후에 ‘혼자 사는 삶’의 출발 지점이기도 하다. 생의 절반을 외국에서 살고 돌아온 그에게서 좀 더 자유로운 사고의 노년 생활에 대해 들어봤다.

# 3500개의 돌로 지은 집

말이 나온 김에 그가 지은 집 얘기부터 하자. 집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김 씨 혼자 손수 설계하고 지었다. 미국에서 20년 넘게 건축설계 업체를 경영했다고 하지만, 회사에서도 건축은 동업자가 전담했고 그는 순전히 경영만 했으니 집짓기에 관한 한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설계도를 그리는 건 물론이고, 설계도면도 볼 줄 모른다. 그런 그가 집을 혼자 구상하고 설계한 뒤 심지어 ‘혼자 지었다’는 건 믿기지 않는다. 집 한 채를 짓는 데 꼬박 2년이 걸렸다는 걸 감안해도 그렇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젊어서도 육체노동을 해본 적 없었던 그가 은퇴 뒤에 환갑을 훌쩍 넘기고서 45㎏짜리 돌 3500개를 하나하나 손수 들어 옮겨서 이 집을 지어냈다는 것이다. 집 짓는 데 쓴 돌은 질감이 맞는 돌을 중국까지 가서 찾아내 수입해 온 것이다. 모두 25t 트럭 5대 분량의 돌을 수입했다. 그가 묻지도 않았는데 “집 짓다가 쓰고 남은 돌 몇 개를 대문 옆에 쌓아뒀는데, 며칠 전에 그걸 본 한 젊은이가 달라고 해서 다 줬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 뒤에 붙은 이 이야기였을 것이다. “젊은 친구가 돌 하나 제대로 못 들고 끙끙대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으쓱하기도 하고…. 뭐 그렇더라고요.”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경수 씨가 2년에 걸쳐 경북 상주의 작약산 아래 손수 지은 돌집. 유럽의 고성이나 수도원을 닮았다.

# 고된 수행의 집짓기

그의 집짓기는 수행에 가까운 것이었다. 돌을 하나하나 옮기고 쌓을 때마다 온 정신을 집중했다고 했다. 한 번도 손수 제 손으로 무엇을 만들어 본 적 없던 그에게 집 짓는 일은 고통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신성했다. 한겨울 꽁꽁 언 손으로 돌을 들어 나를 때, 왜 힘들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한다. “믿지 않겠지만, 집 짓는 2년 동안에 단 한 번도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없어요. 집을 짓는 동안 즐거웠습니다만…. 그래도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아요.(웃음)”

집을 다 짓고 그는 집 앞에 ‘헛간’을 뜻하는 영어 ‘BARN’이란 글씨를 팻말에 써서 세워뒀다. 하지만 그가 지은 집은 누구도 헛간이라 부를 수는 없을 듯했다. 우선 마당에 곱게 심어 가꾼 양잔디가 융단처럼 펼쳐져 있다. 두껍게 켜 낸 나무껍질로 마감한 지붕이 이국적이면서도 고급스럽다. 집은 넓기도 할뿐더러 높기도 하다. 한쪽에 둥근 탑을 세워둔 집의 외관도 그렇지만 현관에 들어서서 본 실내는 더 독특하다. 겉은 석조의 느낌이지만, 안은 목조주택의 분위기다. 마치 오래된 성당의 내부처럼 우람한 기둥과 나무 보(樑)가 내부의 공간과 벽면을 가로세로로 지난다. 높은 천장에다 서양식 공간 구획을 했으면서도, 한쪽에는 뜨끈하게 몸을 지지는 황토찜질방을 들여놓았다. 구조가 독특하고 입체적이어서 가늠하기 어렵지만, 집의 크기로 보면 적어도 2대, 혹은 3대가 살아도 넉넉해 보였다. 그런데 그 큰 집에서 그는 혼자 산다. 그가 혼자 살게 된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하기로 하자.

# 후회 없이 산 30년

그는 미국에서 30년을 살았다.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에 그는 대학교수였다. 서울 경희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82년에 경남대 전임강사로 임용됐다. 스물일곱이란 약관의 나이를 감안하면 파격적인 발탁이었다. 그는 승승장구했다. 전임강사로 일한 지 불과 2년 만에 안식년을 얻어 미국 인디애나 볼 주립대 연수 기회를 따냈다. ‘교환교수’라는 그럴듯한 직함과 명분이 있었지만, 실상은 ‘놀러 가는 연수’였다는 걸 가보고야 알게 됐다. 하지만 미국까지 가서 ‘놀다 오기’에 그는 너무 젊고, 의욕적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진짜 공부’를 시작했다. 보스턴에머슨대에서 경영학 석사과정을 다시 시작했다. 1년의 연수 기간이 끝나가자, 고민 끝에 그는 경남대에 사표를 던졌다. 지금은 제도 자체가 사라졌지만 그때 전임강사란 정규직으로 한 번 임용되면 승진을 거쳐 조교수와 부교수, 교수로 올라갈 수 있었다. 승진의 속도가 문제였지, 전임강사로 임용되는 순간부터 교수로서 삶이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자리를 마다하고 사표를 냈으니 주변의 만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들 미쳤다고 했어요. 하지만 ‘밖을 보는 창문의 크기가 크면 기회의 창도 크다’는 생각에 안정된 자리보다는 미국에서의 공부를 택했습니다. 세상을 넓게 보고 싶었지요. 젊었으니까요.”

그는 이때의 결정에 털끝만큼의 후회도 없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에 머물며 석사 공부를 하다가 돈이 떨어져 건축일을 하던 친구와 동업으로 시작한 사업이 승승장구했으니 말이다. 긍정적인 성격의 그는 미국 생활을 하면서 아쉬웠던 게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사업도 원 없이 해봤고, 골프도 원 없이 쳐봤다고 했다. 타국 땅에서 고생이 왜 없었고, 모든 일이 다 좋을 리가 있었을까만 그는 ‘선택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었다’고 말했다.

# 그가 혼자 사는 까닭

오랜 미국 생활을 마치고 2013년 귀국해 경기 성남의 분당에 거처를 마련했지만, 귀국한 그해에 그는 아내와 이혼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지만, 그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식으로 말했다. 오랜 외국 생활에서 비롯된 사고 차이 때문이었을까. 그는 이혼을 ‘서로가 서로를 자유롭게 한 결정’이라고 말했다. 은퇴 이후 그가 추구하는 삶의 초점은 정확하게 ‘자유’에 맞춰져 있었다.

“아내와는 그동안 두 딸을 낳고 키워서 시집보내고 오랫동안 잘 살았습니다. 이혼을 생각한 건 서로 자유롭게 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이혼했지만 편하게 오갑니다. 집을 지으면서 칠할 페인트 색을 정할 때 가족을 불러 ‘가족회의’를 하기도 했지요.”

이혼 후 그는 가방 하나만 들고서 고향인 경북 문경으로 내려갔다. 1967년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떠나온 고향을 거의 46년 만에 찾아간 것이다. 낙동강 변의 허름한 농가를 빌려 혼자 살면서 그는 중고등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하고, 친구들과 수시로 인근으로 등산을 다니기도 했다. 지금 집을 지은 땅도 그때 친구와 작약산 등산을 하다 발견한 것이었다.

# 운동과 음악, 그리고 교감

그는 요즘 노후 생활을 ‘즐기고’ 있다. 요즘 그가 가장 몰두하는 건 테니스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오랫동안 즐겨온 골프를 그만두고 대신 테니스 라켓을 잡았다. 심폐기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골프보다 테니스가 낫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요즘 틈만 나면 테니스 동호회에서 마음이 맞는 벗들과 수시로 테니스를 즐긴다. 최근에는 산악자전거에도 취미를 붙였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자전거를 끌고 나가는데, 운동량이 많고 체력 소모가 큰 운동이긴 하지만 아직은 힘이 남아돈단다.

그는 귀촌인 10여 명이 모여 만든 클래식 음악 동호회에서도 활동한다. 동호인들은 한 달에 한 번 문경 슈필라움 콘서트홀에서 클래식 음악 공연을 감상한다. 슈필라움 콘서트홀은 대학에서 기업을 운영하다 은퇴한 신기철 지구물리학 박사가 은퇴 후 사재를 털어 건립한 공연장. 이곳에서는 매달 좀처럼 무대에 설 기회를 잡기 어려운 지방 음악가들의 수준 높은 공연이 펼쳐진다.

요즘 그를 행복하게 하는 건 운동과 취미, 그리고 우연히 만나서 서로 교감하는 관계가 된 이성 친구다.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어 ‘이성 친구’라고 했지만, 그의 신중한 표현을 빌리자면 ‘중요한 타인’이다. 타인이면서 중요하게 교감하는 사이란 얘기다. 그는 지금의 이런 생활이 충분히 만족스럽다. 그가 강조한 건 ‘더 이상 가치나 당위에 짓눌려서 삶을 설계하며 살지 말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원대한 계획’ 따위는 필요 없어진 나이예요. 하루하루 즐겁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나이 80세 이후에는 삶의 방식이 달라져야 하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는 이렇게 자유롭게 즐기는 생활을 15년쯤 더 할 수 있습니다.”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이들에게 그가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이야기다.


상주 = 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여행·친구는 가까이… 체면치레·원대한 계획은 멀리”

‘행복한 노후’ 4가지 조언

김경수(65) 씨로부터 은퇴 후 노후 생활에 대한 네 가지 조언을 들었다. 그가 누구나 동의하는 ‘완벽한 노후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설사 한 사람이 은퇴 후 가장 모범적인 삶을 산다 해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누구나 다 같을 수 없다. 그럼에도 김 씨의 조언을 귀담아들어야 하는 건 그가 ‘스스로 100% 만족해하는 노후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조언을 똑같이 따라 한다고 똑같이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건 아니겠지만, 최소한 그의 만족감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짐작하는 단서는 된다. 삶의 절반을 고국에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을 해외에서 살았던 그의 조언에는 우리보다 먼저 은퇴 이후의 생활에 대한 고민을 해본 사회의 경험도 녹아 있다.

1. 여행하라

여행이야말로 노후의 막연한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목적의식을 갖고 여행하고, 거기서 얻는 것들을 정리하는 습관을 가지면 좋다. 준비는 도움을 받지 말고 손수 해야 한다.

2. 시선을 바꿔라

욕망의 기대수준을 낮추고 체면치레를 잊어버려야 한다. 은퇴 이전의 ‘전직(前職)’을 생각하면 남의 시선을 신경 쓰게 된다. 이제 남의 눈치 보며 살지 않아도 된다. 느긋한 마음으로 모든 것의 중심에 ‘나’를 둬라.

3. 보편타당한 가치를 지키는 것으로 충분하다

유교 사회의 전통 때문인지, 삶의 가치를 중시한 나머지 노후의 삶에서도 ‘원대한 계획’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삶의 무대에서 내려와서까지 ‘설계하는 삶’을 살 이유가 있겠는가.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두면 된다.

4. 도반을 만들어라

소통할 상대를 두는 건 정말로 중요한 일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얻어진 관계가 은퇴 이후까지 가는 법은 없다. 그러니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 친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활 방식과 사회적 태도도 보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