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세계 살릴 ‘희망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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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동 성균관대 명예교수·유교철학

전세계 과학·무역전쟁 등 난무
무한경쟁 속 사람들 피폐해져

한국인들 뛰어난 노래·영화로
세계인들에게 엄청난 기쁨 줘

이젠 잘못된 서구 철학 벗어나
편가르기 아닌 하나로 뭉칠 때

홍길동에게 얻어맞은 사람은 홍길동 자체를 기억하지 않는다. 거의가 ‘홍길동은 죽일 놈’이라는 식으로 왜곡해서 기억한다. 그런 사람은 홍길동을 닮은 사람만 봐도 기분이 나쁘다. 그 반면 홍길동에게 후한 대접을 받은 사람도 홍길동 자체를 기억하지 않는다. 대부분이 ‘홍길동은 멋쟁이’라는 식으로 기억한다. 그런 사람은 홍길동을 닮은 사람만 봐도 기분이 좋다.

홍길동은 죽일 놈도 아니고 멋쟁이도 아니다. 홍길동은 나쁜 짓을 할 때도 있고, 멋쟁이 노릇을 할 때도 있다. 홍길동을 죽일 놈으로 기억한 사람도 착각한 것이고, 멋쟁이로 기억한 사람도 착각한 것이다. 자기만 착각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마다 ‘홍길동이 왜 죽일 놈’인지 ‘왜 멋쟁이’인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므로, 그들의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편을 갈라놓고 서로 자기 주장이 옳다고 싸운다. 편을 갈라 싸우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된 말에 놀아나는 것이다. 남의 말에 놀아나고 있는 사람들은 행복할 수 없고 뒤끝이 좋을 수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로 갈라서서 끊임없이 싸움질하고 있다. 이 싸움은 대한민국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지구가 파괴되고 전 인류가 공멸할 수도 있다. 이제 진보를 표방하고 있는 좌파와 보수를 표방하고 있는 우파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함께 생각해 봐야 할 때가 됐다. 지금 좌파들은 카를 마르크스에게 놀아나고 있고, 우파들은 막스 베버에게 놀아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카를 마르크스와 막스 베버는 둘 다 서구 근세 철학자들이다. 서구 근세는 중세 기독교를 부정하고 출발했다. 중세 기독교 시대를 우리는 암흑시대라고 배웠다. 그리고 그 암흑시대에서 탈출하기 시작한 르네상스 운동을 희망찬 시대의 출발점으로 배웠다. 중세 기독교 시대에는 사람들의 존재와 삶의 방식이 간단명료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나 딸이다’ ‘우리의 관계는 형제자매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종속에서 해방된 인간은 달라졌다. ‘나는 누구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결론을 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이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말이다.

뿌리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의 가지들이 뿌리를 알고 있다면 모두 하나다. 하나이기 때문에 반대 방향으로 자라는 것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보기에도 좋다. 그러나 뿌리를 망각한 가지들은 하나임을 잊어버리고 남남의 관계가 된다. 남남의 관계로 자라는 가지들은 자기와 반대로 자라는 가지들을 용납할 수 없다. 사랑하거나 용서할 수는 더더욱 없다. 방향이 같은 가지끼리 뭉쳐서 싸워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뿌리다. 그 뿌리를 자르고 나면 사람들을 연결하는 고리가 없어진다. 사람들은 모두 남남이기 때문에 방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한편이 돼 방향이 다른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투쟁 이론이 치밀해야 한다. 카를 마르크스와 막스 베버는 투쟁 이론을 빈틈이 없을 정도로 치밀하게 만들어낸 뛰어난 사람들이다. 그 치밀한 이론에 속아서 사람들은 편을 갈라놓고 싸운다.

노자는 사람이 싸울 때 가장 많이 발전한다고 말했다. 싸울 때 사람들은 이기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연구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난 이래로 유럽에서는 싸움이 계속됐고 발달한 과학과 무기의 힘으로 전 세계를 지배했으며, 세계의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서구화를 서둘렀다. 그로 인해 오늘날 전 세계는 싸움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무력으로 싸우기도 하고, 경제로 싸우기도 한다. 과학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도 전쟁이고,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서도 전쟁이다. 급기야 국제무역을 가지고도 전쟁을 벌이고 있다. 온 세상이 전쟁터가 됐고, 사람들은 각종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싸울 때는 사람들의 마음이 피폐해진다. 싸울 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이기기 위해 못할 짓이 없다. 사람들 중에는 남을 밟아야 내가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남을 죽여야 내가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들이 무한경쟁을 벌일 때는 친구가 없어진다. 한편이 된 사람들은 친구가 아니라 동지다. 싸움의 내용이 다양하기 때문에 동지가 적이 되기도 하고 적이 동지가 되기도 한다.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도 찾기 어렵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연인도 찾기 어렵다. 친구를 사귀고 있어도 외롭고, 사랑하고 있어도 외롭다.

사람의 마음이 파괴되는 것만큼이나 지구 환경도 파괴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지구가 파괴돼 사람이 지구를 떠나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는 이를 예견하고 말했다. 지구를 탈출해야 할 때가 되면 지구의 것은 다 버리고 떠나야 하지만, 한 가지 한국의 효도사상은 가지고 가자고 했다. 그의 말은 한국에 지구를 살릴 무엇인가가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지금 한국인들은 춤과 노래와 영화를 통해 세계인들을 기쁘게 만들고 있다. 한국인들이 세계를 살리는 희망의 불을 켜 든 것이다. 희망의 불길은 사람의 마음을 밝히는 횃불이 돼 더욱 밝게 타올라야 한다. 이제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더 이상 서구 근세의 잘못된 철학에 놀아나지 않아야 한다. 빨리 편 가르기에서 벗어나 하나가 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희망의 불길이 타오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