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공력’ 과시하듯 佛천재시인 예술혼 생생하게 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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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형훈의 뮤지컬 ‘랭보’

뮤지컬 ‘랭보’(사진)를 본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국내 창작 뮤지컬이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1854~1891)의 삶과 시를 어떻게 담아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그 첫째였다. 두 번째는, 30대 초반의 배우 백형훈이 극 중 17세부터 시작하는 랭보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고 싶어서였다.

지난 13일 서울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 1관 객석은 80%쯤 찼다. 추석 당일임을 고려할 때 400여 석의 중극장에 관객이 이 정도 든 것은 좋은 성적이다. 출연 배우(백형훈, 김종구, 정의제)들의 마니아 관객이 얼마나 열성적인지 알 수 있었다. ‘랭보’의 만듦새에 대한 신뢰가 그 열성을 뒷받침했음을 공연 후 관객 반응에서 확인했다.

이 작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사업에 선정돼 개발 단계부터 아시아 시장 진출을 목표로 했다. 작년 국내 초연 중에 중국에 진출해 한·중 동시 공연하는 기록을 세웠다. 유럽 시인 이야기를 한국에서 뮤지컬로 만들어 중국에서 상연한 셈이다.

이 작품은 시인 랭보와 그의 문학 동반자이자 동성 연인이기도 했던 시인 폴 베를레느(1844~1896)의 관계를 다룬다. 랭보의 고향 친구인 들라에가 이야기의 한 축으로 등장해 극에 입체감을 불어넣는다.

이 뮤지컬의 장점은 세계 문학사적 사건인 랭보와 베를레느의 동성 사랑을 스캔들로 접근하지 않고, 예술혼의 결합과 이별 여정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랭보와 베를레느의 시들을 적절히 각색해서 대사와 노래에 녹여 넣었다. 그것들은 프랑스 문단의 기존 권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유럽 전역을 함께 떠도는 두 방랑자의 시혼을 슬프고도 아름답게 만나게 해 준다. 두 시인이 무대 바닥에 시를 나눠 쓰고 그 시에 키스하는 장면은 울림이 크다. 아쉬움이 있다면, 랭보가 왜 세상은 지옥이며 인생은 불행의 연속이라고 인식하는지 설명하는 일화가 있었으면 스토리에 더 몰입했겠다는 것이다.

이번 무대에서 ‘랭보’ 역을 처음 맡은 백형훈은 올해 뮤지컬 배우로 활약한 지 10년째다. 방송 프로그램 ‘팬텀싱어’를 통해 대중에게 얼굴을 알리기 이전부터 뮤지컬 쪽에선 마니아 팬들이 있었다. 그는 작년 초연에서도 ‘랭보’로 출연했던 정동화, 윤소호 등에 비해 캐릭터를 새로 소화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현재 상연 중인 연극 ‘에브리바디 원츠 힘 데드’(Everybody Wants Him Dead)에서 살인범 역을 맡아 출연하고 있다. 두 작품 동시 출연이 버거울 수밖에 없겠으나, 10년 무대 공력을 과시하듯 랭보를 자신만의 캐릭터로 만들어 냈다.

백형훈의 랭보는 삶을 시에게 바친 젊은 예술가의 예민한 감각과 함께 기성 세력의 위선에 맞서는 폭발력을 보여준다. 동시에 ‘바람 구두를 신은 시인’으로 유목하며 이 세계의 본질을 투시하려 했던 ‘견자’(見者·voyant)의 예술혼을 표출한다. 랭보는 흔히 요절한 천재로 알려져 있지만, 어렸을 때부터 문학과 언어 공부를 집요하게 해낸 노력파였다. ‘착실한 실력파’로 유명한 백형훈은 노력형 천재의 집요함과 오만, 그리고 현실 속에서의 좌절을 잘 잡아냈다. 베를레느 역을 맡은 김종구의 노련한 내공과 들라에를 연기한 정의제의 신선한 열정이 하모니를 이뤄냈다. 배우 김재범, 에녹, 정상윤, 이용규, 백기범 등이 동참하는 ‘랭보’는 오는 12월 1일까지 공연한다.

글·사진 =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