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침묵하는 다수’ 나서야 폭정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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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직 논설위원

기업은 王 모시듯 하는 소비자
文 정부 정책에선 짐짝 취급해
교육·부동산·모빌리티 정책

소비자 편익은 철저히 무시돼
좌파 전체주의 그림자도 비쳐
이젠 침묵해온 소비자 말할 때

국내 주요 그룹이 올해 신년사에서 가장 강조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CEO스코어가 국내 10대 그룹의 2020년 신년사 키워드 빈도수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고객’이 56회로 가장 많았다. 특히 “고객의 관점에서 고민하고, 고객의 마음으로 실천하자”며 올 신년사에서 24차례나 고객을 외친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메시지가 압권이다. 그만큼 심화하는 디지털 시대 경쟁 체제에서 소비자 선택을 받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엄혹한 현실을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그런데 기업들이 이렇게 왕(王)처럼 떠받드는 소비자를 짐짝 취급하는 이들이 있다. 대한민국 정책 결정자들이 그들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 들어 펼치는 각종 정책을 보노라면 “정책 소비자인 국민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지난 6일로 입법예고가 끝난 교육부의 초중등교육법시행령 개정안부터 보자. 2025년부터 전국의 모든 자율형사립고(자사고)와 외국어고·국제고를 일괄 폐지하고 일반고로 전환하겠다고 한다. 교육 소비자는 무시한 채 ‘결정은 내(정부)가 하니 너희(학교·학생·학부모)는 따르라’는 식이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조차 운영 자율성을 가진 사립학교를 늘리는데, 한국에선 학교의 선발권도 학생·학부모의 학교 선택권도 발 디딜 틈이 없다. 문 정부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주52시간제는 또 어떠한가. 정부의 획일적인 근로시간 상한 적용으로 기업 현장에선 “더 일할 자유를 달라”고 아우성이지만 우이독경이다.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제32조 1항은 장식품이 됐다.

문 대통령 스스로 “자신 있다”고 공언했던 부동산 정책에서도 소비자 편익은 논외의 대상이다. 서울시민의 70%는 서울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주택 부족’을 꼽는다.(서울연구원 조사) 수도권 주민이 주택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업그레이드된 시설과 주택 품질’이다.(더리서치그룹 조사) 그런데 정부 정책은 재개발·재건축을 틀어막고 주택 공급을 죄면서 투기 수요를 차단하는 데 맞춰져 있다. 벽에 금이 가고 녹물 나오는 30∼40년 된 낡은 아파트를 ‘내 돈’ 들여 쾌적한 주거공간으로 바꿔 살고 싶다는 주택 소비자의 원초적 본능을 정부가 틀어막고 있는 것이다. 소비자를 무시한 정부 정책은 ‘쇼핑하고 즐길 권리’도 빼앗는다. 정부가 대형 마트 입점 규제에 이어 지자체 지구단위계획 수립 단계부터 대형 복합쇼핑몰의 입점을 통제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정부는 골목상권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휴일 가족들과 함께 집 근처 쇼핑몰에서 맘껏 먹고, 보고, 즐기고 싶어 하는 소비자 욕구는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은 지난 6일 세계 최대 ‘소비자 가전 쇼(CES)’가 열린 미국 라스베이거스 현지에서 스마트 모빌리티(이동편의) 청사진을 공개하면서 “이동의 자유를 제공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동의 자유’를 제공받는 대상에서 한국 소비자들은 제외된다. 세계 각국은 소비자가 보다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승차공유·카풀 등 모빌리티 기술을 독려하며 경쟁하는데 한국은 이를 법(法)으로 막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가 지난 4일 스마트폰 앱을 이용한 카셰어링 사업 테스트를 서울이 아닌 로스앤젤레스(LA)에서 한 이유이기도 하다. 택시 승차거부와 난폭운전에 시달려온 한국 소비자들은 궁여지책으로 혁신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렌터카 기반 ‘타다’로 눈길을 돌렸는데, 이마저 정부와 여당이 택시업계와 짬짜미해 막겠다고 한다.

선진외국은 정부와 기업 모두 소비자의 선택 폭을 넓히고 소비자 편익을 더 끌어올리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이를 통해 지지와 선택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주요 정책 결정 과정에서 소비자는 무시해도 되는 존재가 됐다. 소비자의 ‘선택할 자유’를 막아선 문 정부 정책 이면에는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무시하고 국가가 개인의 삶까지 통제하겠다는 좌파 전체주의의 음습한 그림자도 비친다. 소비자는 ‘침묵하는 다수’로 일컬어진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 같은 폭정(暴政)에 계속 입을 다문다면, 문 정부의 소비자 학대 정책 폭주는 속도를 더할 것이다. 역사는 ‘침묵하는 다수’가 만드는 게 아니라 ‘침묵해온 다수가 말할 때’ 이뤄진다. 이제는 말해야 할 때다. 4·15 총선이 100일도 채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