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논단>부끄러움 모르는 파렴치한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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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 서강대 교수·매체경영학

어쩌다가 나는 부끄러움이 많은 소년이었다. 초교 시절, 남 앞에 잘 나서질 못했고, 어쩌다 나서게 되면 얼굴부터 붉어졌다. 마음이 여리었을까. 슬픈 영화를 보면 눈가부터 촉촉해졌다. 화장실에서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라고 붙어 있는 글을 볼 때마다 맘이 불편해진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는 늘 못마땅한 아들이었다. 그래서 초교 시절 책상 위에 ‘부끄러움을 타지 말자’라고 써 붙여 놓고 연습한(?) 적도 있다. 지인들은 지금의 마초적인 나와는 전혀 상상이 안 된다고 한다. 멜로물보다는 전쟁 영화나 갱 영화를 좋아하고 극한 모험을 즐긴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나와 유년 시절의 나는 상상이 안 된다.

부끄러움은 기본적으로 순순한 감정이자 소박한 정서다. 인류학자 루스 베니딕트는 서양은 ‘죄’의 문화, 동양은 ‘수치’ 즉 부끄러움의 문화라고 분석했다. 식민지 청년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했다. 시인 김광규는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서 4·19세대의 부끄러움을 아프게 표현했다. 관포지교로 유명한 춘추전국시대 정치사상가 관자는 국가의 기틀 4가지를 강조했다. 예·의·염·치(禮義廉恥) 4유(四維)가 그것이다. 그중 수치심은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이라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자기 반성력이 사라지면 국가의 근간이 흔들려 결국은 멸망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부끄러움은 힘이 세다. 사람의 생명까지도 앗아간다. 부끄러움에 스스로 생을 달리한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있었다. 그들은 ‘돈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란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돈 받은 사실이 부끄러워 목숨마저 버린 사람’ 즉, 부끄러워할 줄 아는 ‘참인간’이라고 보고 싶다. 그들의 죽음을 미화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래도 그들은 인간만이 느끼는 부끄러움에 대해 ‘한 생각’한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이 변명에 급급할 때 그들은 부끄러움에 단 하나뿐인 목숨을 던졌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사회는 부끄러움이 없다. 부끄러움은 권력에서부터 사라졌다. 조국 사태, 유재수 ‘비리’ 사건, 울산시장 선거 공작 의혹 등에서 보듯이 그 어디에서도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지나칠 정도의 뻔뻔함으로 되받아쳤다. 국회의장은 아들을 위해 법안 날치기에 앞장섰다. 삼권분립의 나라에서 입법부 수장 출신은 행정부 2인자로 들어가면서 ‘국민을 위해서’라는 핑계를 댔다.

인간만이 가지는 숭고한 가치인 부끄러움을 지금 정권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부덕의 소치…’라며 눈물을 글썽이며 자리에서 내려오던 권력자의 모습은 지금의 정권에서 더는 보기 어렵다. 부끄러움에 생을 저버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곧 ‘노무현 정신’을 숙주로 탄생한 것이 문재인 정권이다. 그런 그들이 정작 부끄러움을 내팽개칠 때 인간 ‘노무현’을 좋아하고 사랑했던 많은 사람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느끼게 된다. 적폐청산을 하자고 온몸으로 지지했던 정권이 더 적폐스러운 이 현실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우리 사회는 이제 최소한의 수치심마저 사라졌다. 하루하루가 민망하고 모멸적인 사건의 연속이다. 부끄러움으로 불리는 염치가 사라지면 파렴치한 사회가 된다. 그러한 사회에는 살고 싶지 않다. 누군가가 나서 부끄러움을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 그토록 싫어했던 부끄러움이 지금에 와서야 참으로 위대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부끄러움이 오늘을 사는 나를 몹시 부끄럽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