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영국 女작가 소설은 ‘주체적 여성’ 탄생시킨 밑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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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정치사 / 낸시 암스트롱 지음, 오봉희·이명호 옮김／그린비

‘18세기 말 무렵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만일 내가 역사를 다시 쓴다면 십자군전쟁이나 장미전쟁보다 이 변화를 더 충실하게 기술하고 더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 변화란 중산층 여성들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1882∼1941)가 ‘자기만의 방’에 쓴 글이다. 울프가 언급한, 글 쓰는 중산층 여성을 이 책은 ‘가정 여성(domestic woman)’이라 부른다. 이전 시대의 귀족 여성과 구분한 명칭으로, 18세기 영국에 등장한 여성 작가들이 소설 작품 속에서 구현한 새로운 여성상을 일컫는다. 가정 여성은 사회적 신분과 육체적 매력을 내세웠던 귀족 여성을 밀어내고 이상적 여성상으로 자리 잡는다. 이름 그대로 가정에서 자신의 덕성을 가꾸는 가정 여성의 매력은 여성다움과 내면의 깊이, 타인의 행복에 대한 관심으로 구성됐다. 특히 난잡한 성적 존재가 아니라 도덕적 품성을 지닌 존재로서 사회의 성을 규율하는 권력을 행사했다.

영국 듀크대 영문과 교수인 저자는 가정 여성의 권력이 얼핏 비정치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고 본다. 소설 속에 재현된 가정 여성이 다수 대중이 욕망할 만한 매력적인 이미지로 그려졌고, 중산계급이 거기 기대어 귀족계급과 벌인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87년 영국에서 나온 이 책은 근대 역사에서 여성들이 억압받는 피해자나 희생자였던 것만은 아니고 글쓰기를 통해 근대 개인을 만든 행위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저자는 자신의 논지를 여성용 품행지침서, 교육용 논설과 함께 18세기에 출판된 새뮤얼 리처드슨과 헨리 필딩의 소설들, 19세기 초·중반에 나온 제인 오스틴과 샬럿 브론테의 작품들을 통해 입증했다. 미셸 푸코의 성담론에 의지해 영국 소설사에서 18, 19세기 여성 작가 작품들의 정치성을 새롭게 갈파해냈다. 이 책은 성적 욕망을 통제하는 가정 여성의 권력이 미친 부정적 영향도 살핀다. 1830년대 이후 노동자 계급을 문란하고 방종한 세력으로 여기게 하면서 중산계급의 헤게모니 구축에 담론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이다.

책 뒷부분에 있는 ‘옮긴이의 말’은 방대한 본문 내용을 축약해서 소개하면서 그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다. 역자 중의 한 사람인 오봉희 경남대 교수는 이 책이 근대 영국소설에서 가정적 이상이 실패하는 사례들은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출간된 지 30년이 지난 책을 우리말로 옮긴 것은, 소설의 발생과 전개 과정을 섹슈얼리티, 젠더와 결합해서 사유하려는 문제의식이 생산적 논쟁거리를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원제(Desire and Domestic Fiction)는 직역하면 ‘욕망과 가정소설’이 된다. 한국어판은 가정소설 속 욕망의 언어적 재현을 정치사의 일부로 읽어야 한다는 점에서 원저의 부제(A Political History of the Novel)를 제목으로 삼았다. 536쪽, 2만9000원.

장재선 선임기자 jeije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