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시애틀 블루(Seattle b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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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수 DGIST 석좌교수 커뮤니케이션학

유학생활 ‘제2의 고향’ 시애틀
훼손되지 않은 산림·해안 경탄

최근 코로나 美유행 시작 汚名
무분별한 개발이 원인 아닐지

한국에도 수백만 외국인 체류
‘싸구려 자연’ 보여주지 않아야

격동의 세월을 보낸 한국인은 누구나 제2의 고향을 갖고 있지 않은가?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푸른 희망을 품고 너도나도 서울로, 대도시로 몰려갔던 시절이 있지 않은가? 객지(客地)에서 깨지고 일어서면서 설움에 북받쳐 울적했던 적이 있지 않은가? 청년 이병철도, 정주영도 그랬을 것이다. 우연히 ‘서울 이곳은’이라는 노래를 듣게 됐을 때, 객지 청년의 희망과 우울의 이중적 블루(blue)가 온전히 다가오는 듯했다.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무대가 된 미국 서북부의 도시 시애틀. 지금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스타벅스, 코스트코 등 신(新)산업의 요람지로 잘 알려진 그곳은 내게 서울 못지않은 제2의 고향으로 각인돼 있다. 성장과 설움이 교차했던 고향 같은 곳이다. 국가 유학시험을 통과해야만 해외유학이 가능했던 시절, 지금은 사라진 노스웨스트 항공기를 타고 8월의 한밤중에 도착했던 시택(Sea-Tac)공항에서 맡은 공기는 신선함 그 자체였다. 오염이 극에 달했던 1970년대 서울과 너무나 달랐다.

그렇게 시작한 대학원 생활. 요즘 같은 봄날의 끝자락이면 ‘시애틀 블루(Seattle blue)’로 가슴앓이를 했다. 추적추적 정말 많은 비가 내리는 곳이라, 비를 사랑하지 않고는 우울증에 걸리기 십상이다. 그렇게 반년 이상 오던 비가 봄날이 오면 잦아들기 시작하고, 드디어 환상적인 날씨가 가을 초입까지 이어진다. 이때 시애틀을 방문한, 우기(雨期)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마치 천국 같다고 말한다. 그런 천국이 시작되는 봄학기 말이면 성적은 곤두박질쳤고, ‘찬란한 우울’이 넘실거렸다.

시애틀의 강렬한 첫인상은 공항을 미끄러져 나오면서 마주치는, 해발 4000m가 넘는 눈 덮인 레이니어 산(Mt. Rainier)이다. 중학 시절 유니언인지 스탠더드인지 영어 교과서에서 읽었던 바로 그 산(山)인 것을 깨달은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넘쳐나는 빗물과 온화한 기후, 그리고 무엇보다 일상생활 속의 자연보호로 어딜 가나 만나는 울창한 산림과 맑은 강물, 때 묻지 않은 해안을 즐길 수 있었다. 당시 발가벗은 우리의 산야와 비교할 때 얼마나 부러웠던지!

그런 자연환경 속에서 무엇이든 자유롭게 사유하고 떠들어댈 수 있는 대학원 생활은 개인적으로 많은 성장과 희망을 제공했다. 세계 곳곳에서 온 별의별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북한과 매우 가까웠던 아프리카 나라에서 온 친구는 한동안 나를 북한에서 온 유학생으로 알았다. 남태평양에서 온 친구는 수업 중에, 자신을 장관으로 초빙하고 싶다는 그 나라 총리의 편지를 보여주기도 했고, 베트남전쟁에서 첩보병이었던 미국 친구는 자기 집으로 초대해 서재 창가에 키우고 있는 마리화나를 자랑하기도 했다. 이런 기막힌 자유로운 환경과는 대조적으로, 연일 미국 언론에 소개되는 가혹한 독재정권의 고국 소식은 너무나 암울했다. 또 다른 시애틀 블루였다.

가끔 시애틀에 들를 기회가 생기면 현혹적인(deceptive) 향수에 젖곤 한다. 주변에 보석 같은 자연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두 곳은 내게 ‘블루’의 상징이다. 그중 하나는, 첫 학기를 마치고 스트레스도 풀 겸 미국 친구가 나를 데려간 시애틀 인근의 디셉션 폭포(Deception Falls)다. 캐스케이드(Cascade) 산맥의 비경(秘境)과 처음 마주하면서 그 아름다움에 얼마나 경탄(驚歎)했는지 모른다. 한마디로 무아지경(無我之境)! 어쩌면 친구가 옆에 없었다면 탐미(耽美)의 희열을 영원토록 간직하고 싶어 폭포에 몸을 던질 수도 있었다. 뒷날 사람들은, 우중충한 비가 그치지 않는 시애틀에서 우울증에 걸린 어느 한국 유학생이 이곳에서 생(生)을 마감했다는 전설을 지어내겠지만.

또 하나는, 디셉션 해협(Deception Pass)이다. 높다란 절벽의 해협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걷다 보면, 주변의 빼어난 경관과 우리나라 명량대첩의 해협 울돌목 같은 거센 해류에 정신을 놓기 딱 좋은 곳이다. 이미 고인이 됐지만, 한국인 이민자로 국제학 대학원을 다니고 있던 친구에게 이끌려 그곳을 방문했을 때, 인근 공원에서 처음으로 캠핑을 경험했다. 모닥불을 피우고 위스키 잔을 비우면서, 언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와 번영을 누릴 수 있을지를 놓고 밤새 열변을 나눴다. 이제는 옛이야기가 됐지만.

‘싸구려 자연(Cheap Nature)’이란, 환경사학자 제이슨 무어(Jason W. Moore)가 탐욕적 자본주의가 내몰고 있는 전(全)지구의 자연 파괴, 환경 파괴를 질타하면서 쓴 용어다. 기후변화와 다양한 생물 멸종, 그리고 바다 산성화 등이 모두 싸구려 자연 자원 인식 속에 무자비한 개발로 생긴 결과물이다. 과거의 노예무역, 오늘날의 이주노동에서 보는 것처럼, 인간도 싸구려 자연 자원의 일부로 인식될 뿐이라는 것이다. 개발과 성장에 몰두해온 우리도 그런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누구에게나 제2의 고향은 푸른 희망으로 설움을 견디게 했던 곳이다. 나에게 시애틀은 바로 그런 곳이다. 첨단산업에 힘입어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고, 코로나19가 미국 내에서 먼저 크게 유행한 곳이 시애틀이라는 최근 소식을 접할 때, 지구 45억 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것처럼 보였던 주변의 자연환경을 혹시 싸구려로 난(亂)개발하고 있지 않은지 염려된다.

국내 체류 외국인 수가 22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들에게 한국은 푸른 희망을 품고 찾아온 제2의 고향인지 모른다. 그들 역시 설움을 견디면서 깨지고 일어서는 ‘블루’의 경험을 이 땅에서 할 것이다. 그러나 제발 우리의 ‘싸구려 자연’ 인식은 배우지 않았으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