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과학의 최전선, 궁극의 질문들>빛의 속도·중력·플랑크 상수 조합하면 시간·길이의 ‘최소 단위’ 얻어져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일러스트 =토끼도둑 작가

(18) 시간과 공간에도 최소 단위가 있을까? 플랑크 시간과 공간의 수수께끼

원자가 물질의 궁극적 실체는 아니지만 통상적으로 물질의 최소 단위
시간과 거리의 최소 단위가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고
너무 작아 실험으로 검증할 수는 없지만 통계역학으로는 추측 가능

지금은 드라마라고 하지만 예전엔 이를 연속극이라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연속극이라고 해서 방송 시간이 끊임없이 지속되지는 않았다. 여기서 연속은 이야기 전개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는 뜻이다. 어려울 게 없을 것 같은 연속의 개념도 수학책에 등장하면 어렵다. 고등학교 수학에 연속 함수가 등장한다. 그 기저에는 실수의 연속성이라는 더 어렵지만 흥미로운 얘기가 숨어 있다.

종이 위에 연필로 직선을 하나 그어 보자. 이 직선은 연속일까? 직선의 연속성이란 직선을 이루는 점들이 빈틈없이 이어짐을 말한다. 직관적으로는 연속으로 보인다. 이런 직선에 눈금을 그려 넣고 0, 1, 2 같은 숫자를 밑에 달아서 수학 문제를 풀었던 기억이 다들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은 사실 직선 위의 점들에 실수를 하나씩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직선이 연속이라면 실수도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0과 1 사이에는 점이 몇 개나 있을까? 직선 위의 점과 실수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있다면 점의 개수는 0과 1 사이에 있는 실수의 개수와 같다. 그건 무한히 많아서 셀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여러분은 정답을 맞힌 것이다.

자연수의 개수는 무한히 많긴 하지만 셀 수 있는 무한이라고 한다. 자연수들의 비로 표현되는 유리수의 개수도 셀 수 있는 무한이다. 그런데 실수는 셀 수 없는 무한이다. 이것은 19세기 후반에 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가 증명했다. 그 결과는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0과 1 사이에는 무한히 많은 유리수가 있고, 그 수들이 0과 1 사이를 촘촘히 채우고 있는 것 같지만, 유리수와 유리수 사이에는 빈틈이 셀 수 없이 많이 존재한다. 그래서 유리수만으로는 연속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유리수를 다 모아도 길이가 나오지 않는다. 유리수와 유리수 사이의 빈틈을 바로 셀 수 없이 많은 무리수가 무한정 채우고 있다. 이쯤 되면 이 글을 그만 읽고 싶은 사람이 많으리라. 그렇지만 참고 연속해서 읽으면 심오하고 재미있는 물리 이야기로 이어진다.

종이 위에 그어진 직선이 연속인가란 질문을 물리학자는 직선을 구성하는 물질이 연속으로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이 질문은 물질의 궁극적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것으로 이어진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물질은 연속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원자의 발견으로 물질의 연속성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지금은 원자도 원자핵과 전자로 분해가 되고,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양성자와 중성자는 다시 쿼크로 분해가 됐다. 현재의 표준 모형에 따르면 물질은 원자핵을 구성하는 쿼크들과 전자와 같은 렙톤들이 결합해 만들어진다.

쿼크와 렙톤은 크기를 가지고 있을까? 현재까지의 실험 결과에 따르면 10⁻¹⁹미터보다 작으며, 크기가 거의 없는 점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쿼크와 렙톤으로 된 입자들이 셀 수 없이 무한히 모이면 연속인 물질이 될 수 있을까? 입자는 연속인 물질을 만들 수 없다. 종이 위에 연필로 그은 직선은 연속이 아니다. 여기서 입자와 위치만 있고 넓이도, 길이도, 크기도 없는 수학적 점의 차이가 드러난다. 입자에는 수학이 아니라 물리 법칙이 적용된다. 특히 물질을 불연속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은 양자 역학의 원리다.

양자 역학에 따르면 물질은 입자의 성질만이 아니라 파동의 성질도 가진다. 파동성으로 인해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 또는 시간과 에너지 사이에는 불확정성 관계가 성립한다. 두 양의 불확정성을 곱한 값이 양자 역학의 기본 상수인 플랑크 상수보다 크다는 것이 저 유명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다.

물질을 연속적으로 만들려면 입자를 빈틈없이 붙여야 한다. 그런데 두 입자 사이의 거리를 줄이면 위치의 불확정성이 줄어든 만큼 운동량의 불확정성은 커진다. 불안정해지는 것이다. 서로 반대 전하를 가진 원자핵과 전자는 서로 끌어당기지만, 결코 만나지는 못한다. 가까워질수록 줄어드는 전기 에너지와 불확정성 관계 때문에 커지는 운동 에너지 사이에 타협이 이뤄지는 거리에서 안정된 상태를 이루게 돼 서로 맴돌게 된다. 이 덕분에 원자가 크기를 가지게 되는 것이고, 삼라만상이 형태를 띠는 것이다.

양자 역학의 원리는 전자의 질량과 전자기력의 세기만으로 원자의 크기를 정해 주는 경이로운 법칙이다. 마찬가지로 원자핵의 크기는 양성자의 질량과 강력의 세기만으로 정해진다. 그래서 유한한 크기의 공간에는 유한한 수의 원자만 들어갈 수 있다. 연속적인 물질은 만들어질 수 없다. 원자가 물질의 궁극적 실체는 아니지만, 일상에서 원자가 분해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통상적인 물질의 최소 단위로 간주된다. 물질은 원자 단위로 끊어지며 연속이 아니다.

물질은 연속이 아니지만, 물질이 담겨 있는 공간은 연속일까? 물질의 변화를 나타내는 시간은 연속일까? 만약 아니라면 시간과 공간에도 최소 단위라는 것이 있을까? 시간과 공간이 본격적인 과학적 탐구 대상이 된 것은 물체의 운동을 다루는 뉴턴 역학이 등장하면서다. 아이작 뉴턴은 시간과 공간은 물체의 존재와 관계없이 존재하며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거리는 모든 관찰자에게 보편적으로 같다는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 개념을 도입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완성된 전자기학은 이 개념과 맞지 않았다. 결국 20세기 초에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거리는 관찰자의 상대 운동에 따라 달라지고 보편적으로 같은 것은 빛의 속력이라는 특수 상대성 이론으로 대체됐다. 이어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관찰자의 상대 운동뿐만 아니라 주변의 물체에 의해서도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거리가 달라진다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내놓았다. 뉴턴의 중력 이론은 이제 물질과 시공간의 동역학으로 바뀌었다. 시공간이 단지 물질이 움직이는 배경이 아니라 물질과 같은 동역학을 가진다면 물질과 마찬가지로 양자 역학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을까? 물리학자들은 그런 궁극적 이론이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이를 양자 중력 이론이라고 부른다.

아직 시간과 공간이 양자 역학의 원리를 따른다는, 그래서 시간과 거리의 최소 단위가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그렇지만 현재 확립된 시공간과 물질의 근본 이론으로부터 최소 단위에 대한 추측은 해 볼 수 있다. 특수 상대성 이론의 기본 상수인 빛의 속력, 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본 상수인 중력 상수, 양자 역학의 기본 상수인 플랑크 상수를 조합하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시간과 길이의 단위가 있다. 이를 ‘플랑크 시간’과 ‘플랑크 길이’라 하는데, 각각 10⁻⁴³초와 10⁻³⁵미터다.

이 크기는 현재의 기술로 측정할 수 있는 최소의 시간과 거리에 비해 너무나 작아서 실험을 통한 최소 단위의 검증은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아주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원자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없었을 때도 물질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잘 보여 준 사례가 있었다. 바로 통계 역학의 성공이었다. 통계 역학은 물질에서 보이는 열 현상을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집단적 성질로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통계 역학은 열역학의 기본량인 온도와 엔트로피가 원자들의 에너지 분포와 가능한 상태의 수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밝혀 주었다. 놀랍게도 최근에 이와 비슷한 과정이 블랙홀의 열역학에서 진행되고 있다. 블랙홀의 정보와 엔트로피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시공간의 양자적 측면이 드러나고 있다.

1972년에 야코브 베켄스타인은 블랙홀도 엔트로피를 가진다는 제안을 했다. 근거는 간단했다. 블랙홀이 엔트로피를 갖지 않는다면, 엔트로피를 가진 물체를 블랙홀에 던져 버리면 그만큼 우주의 엔트로피는 줄어들고, 이것은 닫힌계의 엔트로피는 줄어들 수 없다는 열역학 제2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이어서 스티븐 호킹은 블랙홀의 지평선에서 열복사가 방출된다는 것을 밝혔고 블랙홀의 에너지, 온도, 엔트로피의 열역학적 관계로부터 블랙홀의 엔트로피가 지평선의 면적을 플랑크 길이의 제곱으로 나눈 값에 비례한다는 결과를 얻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주목할 점이 있었다. 하나는 엔트로피는 계가 가질 수 있는 상태의 수를 세는 것이어서 통상적으로 부피에 비례하는 데 반해 블랙홀의 엔트로피는 표면적에 비례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플랑크 길이의 제곱이 표면적을 나누므로, 이것이 면적의 최소 단위로 보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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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이 열역학적 추론을 통계 역학을 통해 확인하는 과정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블랙홀은 ‘극강’의 중력이 작용하는 계로 통계 역학적 계산에는 구체화된 양자 중력 이론이 필요하다. 현재 초끈 이론과 고리 양자 중력 이론 등이 유력한 후보다. 최근에는 초끈 이론을 써서 블랙홀과 블랙홀이 방출하는 열복사의 엔트로피를 계산하는 데 주목할 만한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초끈 이론이 가진 홀로그래피 특성은 엔트로피를 계산하는 방법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왜 부피가 아니라 표면적에 비례하는지도 설명한다. 블랙홀 엔트로피의 계산 결과는 연필로 그은 직선이 사실은 원자로 이루어진 불연속적인 존재인 것처럼, 블랙홀 지평선도 양자화된, 그러니까 불연속적인 공간 덩어리로 구성된다는 단서를 제공한다. 블랙홀 지평선에서 시공간을 이루는 최소 단위의 아지랑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김항배 한양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 용어설명

플랑크 단위 : 시간과 길이의 단위인 초와 미터는 인간에게 편리하도록 채택된 단위다. 1899년 독일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자연의 기본 상수만을 사용해 인간의 창조물과는 무관한 ‘자연 단위’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 기본 상수로는 물질의 한계 속력인 빛의 속력, 물질의 입자성과 파동성을 연결하는 플랑크 상수, 물질과 시공간을 연결하는 중력 상수 등이 있다. 이들을 조합해 만든 단위를 플랑크 단위라고 하며, 1플랑크 시간은 5.4×10⁻⁴⁴초이고, 1플랑크 길이는 1.6×10⁻³⁵미터며, 1플랑크 질량은 2.2×10⁻⁸킬로그램이다. 자연의 궁극적인 이론인 양자 중력 이론에서는 플랑크 단위가 더 편리한 단위가 된다.

홀로그래피 : 홀로그래피는 3차원 입체 영상을 2차원 표면에 간섭무늬로 기록하고 재생하는 기술이다. 블랙홀 열역학에서 영감을 받은 헤라르뒤스 엇호프트는 양자 중력의 특성으로 공간의 부피에서 일어나는 일이 한 차원 낮은 그 공간의 경계면을 통해서 모두 기술될 수 있다는 홀로그래피 원리를 제안했다. 1997년 후안 말다세나는 초끈 이론에서 AdS/CFT(반-드시터 공간/등각장론) 대응이라는 방식으로 홀로그래피 원리가 성립한다는 것을 제안했고, 이후 많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확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