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간짜리 연극무대 선 정경호… 섬세한 동성애 연기로 관객 홀리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 리뷰톡 -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엔젤스 인 아메리카’(연출 신유청). 히어로물 시리즈도 아닌데, 두 번에 걸쳐 공개된다. 각 4시간, 총 8시간에 이르는 작품. 누가 이 긴 연극을 볼까 싶은데, 티켓은 일찌감치 동났다. ‘믿고 보는’ 국립극단의 무대이기도 하지만, 특별한 흥행 요소가 더 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로 사랑을 받은 배우 정경호가 처음 도전하는 연극이라는 점. 드라마 후 무대로 눈을 돌린 그의 행보도 놀랍지만, 배역도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르다. 1980년대 동성애자 역이다.

TV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도 연극에선 번번이 쓴맛을 보곤 한다. 연극은 생방송이다. ‘다시’ 찍을 수 없고, 토씨 하나만 틀려도 몰입도를 떨어뜨리기에, 크고 정확한 발성과 발음이 기본. 정경호의 무대는 어땠을까. 벤치에 앉아 연인에게 에이즈에 걸렸음을 고백하고, 드래그 퀸(여장 남자 가수)의 복장으로 꿈속에서 하퍼와 나누는 대화, 병문안 온 친구와 야한 농담을 주고받는 등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작품 속으로 녹아들었다. 프라이어만의 눈빛과 손짓, 걸음걸이 등 섬세하고 빈틈없는 연기는 그가 연극은 처음이지만, 이미 적잖은 경력과 탄탄한 내공을 소유한 좋은 배우임을 증명했다. 무대 위 다른 배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말하기엔 다소 아쉬움이 있지만, 무대에서 만난 TV 스타의 아우라는 그만의 것이기도 했다.

‘엔젤스 인 아메리카’는 미국 극작가 토니 쿠슈너의 대표작으로 1991년, 2018년 두 번이나 토니상을 받은 명작이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반동성애적 분위기의 사회 속에서 신체적·심리적으로 버텨야 했던 동성애자들의 모습을 은유적 서사로 풀어낸다. 배경은 뉴욕. 네 사람의 남성이 등장하고, 이들은 모두 동성애자다. 에이즈에 걸린 동성애자 프라이어(정경호), 그의 연인 루이스(김세한)가 있다. 또 모르몬교도며 여성과 결혼했으나 자신의 성 정체성에 괴로워하는 조셉(정환), 여기에 동성과의 성관계를 즐기지만 정치적으로는 극우 보수며 권력에 집착하는 변호사 로이(박지일)의 이야기가 여러 개의 축을 이루며 교차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동성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때 시작도 끝도 없는 공포의 ‘전염병’이었던 에이즈를 둘러싼 한 시기의 풍경을 펼쳐놓는다. 당신이 지금 아는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날이 곧 온다. 우리가 알던 진실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코로나19로 견고하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무너진 지금, 이 연극은 30여 년 전의 이야기가 여전히 유효함을 일깨워준다. 무대가 다 끝나갈 무렵, 조용히 가슴 한편에 마지막 대사가 내려앉는다. “머지않아 역사가 부서질 거야. 밀레니엄이 다가오고 있어.” 공연은 오는 26일까지.

내년 2월 두 번째 편, ‘파트 투: 페레스트로이카’가 공개된다.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