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질었던 어미·증오 키운 아들… 죽음 앞에서 화해하다[안진용 기자의 그여자 그남자]

  • 문화일보
  • 입력 2022-06-21 08:52
  • 업데이트 2022-12-2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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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진용기자의 그여자 그남자 -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옥동과 동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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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싸늘했던 옥동
남편·딸 잃은후 첩살이 하면서
아들에 “날 작은엄마라 불러라“
자식 사랑하는법 몰라 상처만 줘
끝내 ‘미안하다’ 말조차 못건네

애증만 남은 동석
가족 냉대에 적대적 감정 키우다
아픈 어미와 여행길서 마음 열어
된장찌개 끓여놓고 떠난 母情에
“화해하고 싶었단걸 이제야 알아”


그 남자는 절박했다. 사랑하는 그 여자를 향해 “내가 먹여 살릴 테니 도망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그 여자는 눈 하나 꿈쩍 안 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오히려 그 남자의 뺨을 올려붙였다. 그 남자의 애정은 애증이 됐다. 한평생 그 여자의 곁을 맴돌았다. 그러면서 차갑게 대했다. 쏘아붙이기 일쑤고, 바락바락 달려들었다. 누군가 타일러도 소용없었다. “하늘에 맹세코 널 이해한다”며 둘의 화해를 청하는 이들에게 “날 이해해? 뭘 이해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X발 열 받게!”라고 일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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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속내는 알 수 없었다. 충분히 사랑하면서도 그 남자에게 유독 냉랭했다. 그 남자가 돈 될 만한 물건을 몽땅 챙겨서 다시 한 번 “도망가자”고 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 “도둑놈의 새끼.” 그 여자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남자조차도. 긴 시간이 흘러 사랑보다 증오가 더 커진 그 남자에게 그 여자는 이따금 전화를 건다. 하지만 대부분 받지 않는다. 무슨 말이라도 건넸다가는 그 남자의 육두문자 섞인 질타가 쏟아진다. 그래도 그 여자는 별말이 없다. 그냥 묵묵히 그 남자의 눈길이 닿을 그 언저리에서 서성일 뿐이다.

그 남자는 그 여자의 아들이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 아들의 어미다.

◇동석, 그 여자의 속내가 궁금하다

그 남자의 이름은 동석이다.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지금은 트럭 하나에 온갖 물건을 싣고 다니며 파는 만물상이다. 현대판 봇짐장수다.

동석의 삶은 고되다. 트럭을 배에 싣고 목포로 간다. 육지에서 온갖 곳을 누비며 물건을 떼와 제주에서 판다. 트럭은 그의 이동수단이자 숙소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걸쳐 몸을 길게 누이고 모포 한 장 뒤집어쓴 채 잠을 청한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하나 있다. 어릴 적 제주에서 만났으나 홀연히 떠났던 선아다.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됐다가 이혼했다. 지금은 전남편과 아들을 두고 양육권 분쟁 중이다. 게다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 아직 선아에게 동석은 ‘남자’보다는 ‘고향 오빠’에 가깝다. 누구 하나 동석을 온전히 사랑해주지 않는다. 그래도 동석은 선아가 좋다.

동석에게도 단란한 가정이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와 누이를 바다에서 잃었다. 어미는 어린 동석을 데리고 아버지의 친구네 집으로 첩살이하러 들어갔다. 그러면서 동석에게 말했다. “날 ‘작은 어멍’이라 불러라.” 그렇게 동석은 어미를 잃었다. 그 집의 두 아들은 이유 없이 동석을 팼다. 동석은 결국 현금과 패물들을 훔쳐 달아나며 어미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어미는 그 손마저 뿌리쳤다.

나이가 들어, 어미는 푸릉마을 시장 한 귀퉁이에서 나물을 판다. 시장 입구에서 “골라 골라 오천 원, 오천 원!”을 외치는 만물상 동석의 눈길이 항상 스치는 그 자리다. 어느 날 어미가 다가와 만 원 한 장을 놓고 바지 한 장을 집어간다. 득달같이 달려온 동석은 들이댄다. “한 장 오천 원, 두 장 만 원, 물건 사멍 값도 몰라? (옷 여러 장을 던지며) 가져 불고 나 장사하는 디 다신 오지 맙서. 나가 엄청 참고 이신디 건들지 맙서, 예? 작은 어멍 돌아가시면 내가 땅을 치고 후회해 줄게. 그러니까 살아생전에 보지도 말고, 아는 척도 말자고! 예?”

어느 날 친한 선배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자다가 전화를 받은 동석에게 그 선배는 “너의 어멍, 암이다. 그것도 말기”라고 알려준다. 짐짓 놀랐지만 “그래서?”라고 되물은 그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라는 선배에게 “나중에 후회할게”라고 한 후 전화를 끊는다. 하지만 그의 가슴에는 어미의 소식이 가시처럼 걸려 있다.

동석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엄마가 자신에게 그토록 모질게 대했는지. 유일하게 그가 마음을 여는 선아가 말한다. “따지고 싶을 땐 따지고, 묻고 싶을 땐 물어.” 살아 있을 때, 물을 수 있을 때 직접 묻고 답을 구하라는 선아의 이야기에, 동석은 결심이 선다.

◇옥동, 그 남자에게 미안하다는 말조차 못하다

어미의 이름은 옥동이다. 아들 동석이에게 자신의 이름 석 자 중 ‘동’자를 물려줬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다. 하지만 남편과 딸을 잃은 후 첩살이를 하러 들어가면서 동석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

선아의 이야기에 용기를 얻은 동석은 “목포에 같이 가자”는 옥동과 동행하면서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하세요. 내가 다 들어줄게. 하고 싶은 것 다 한 다음 기대해. 그다음 내가 무슨 말을 할지”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동석을 대하는 옥동의 태도는 애매모호하다. 수십 년 만의 아들과의 동행이 기꺼우면서도 “나한테 상처를 준 건 아시냐, 미안하긴 하시냐”는 질문에 “미안할 게 내가 너한테 뭐 있어?”라며 재차 상처를 준다. 마치 정이라도 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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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동이 살던 마을을 찾으러 헤매다가 다리를 다친 옥동을 동석이 업고서야 둘은 빗장을 푼 대화를 나눈다. 유난히 가벼운 어미를 업고 “이게 다 업힌 거야? 뭐야. 가죽만 남았잖아”라고 타박하면서도 “왜 살면서 한 번도 나한테 미안하단 소리 안 해”라고 묻는 동석에게 옥동은 말한다. “어떤 미친년이 미안한 걸 아냐. 니 어멍은 미친년이다. 그저 자식이 세 끼 밥만 먹으면 되는 줄 알고, 그저 학교만 가면 되는 줄 아는 멍청이처럼. 자식이 맞는 걸 보고도 멀뚱멀뚱. 넌 나 죽으면 장례 치르지도 마라. 울지도 마라.” 생때같은 아들을 밀어내고 상처 준 자신을 ‘미친년’으로 규정한다. 여태껏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옥동에겐 아들에게 세 끼 더운밥을 먹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었던 탓이다. 그 옛날, 배우지 못한 적잖은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아들의 밥 한 끼가 전부인 어미

아들과 어미의 관계는 복합적이다. 아들에게 어미는 태어나서 처음 접한 이성이다. 그래서 호의적이면서 무의식적인 성적 애착을 갖게 되는 대상이다. 동시에 동성이자 어미의 남자인 아비를 적대적으로 대하는 감정이 싹튼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동석의 경우, 살갑던 아비를 잃은 후 아비의 친구이자 자신 친구의 아비이기도 한 남성에게 어미를 빼앗긴다. 그를 아비라 불러야 했고, 어미는 순식간에 ‘작은 어미’가 됐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이 남성에 대한 동석의 적대감은 차고 넘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남자의 피붙이인 두 아들은 이유 없이 동석을 때렸다. 그런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인 어미는 싸늘한 시선만을 보냈다.

오랜 세월 그 울분을 삭여 온 옥동은 동석을 나무라는 배다른 형제에게 소리친다. “너네 형제한티 뻑하면 죄 없이 줘 맞고, 지 어멍은 첩살이에 종살이 하는디, 그만썩 참았으면 많이 참았지게. 젊디젊은 새끼가 너네들한티 나한티 칼 안 들고, 지 배 안 가르고 살아준 것만도 고맙지게. 무사 야이를 욕햄시니, 어디서 거지 같은 도둑놈의 새끼랜 욕을 허냐!” 한평생 고개 숙이고 살아온 옥동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동석을 위해서.

동석은 그 좋아하던 된장찌개를 기피하는 것으로 옥동에 대한 미움을 드러낸다. 옥동이 끓여주던 된장찌개를 유독 좋아했던 그는 “된장을 끊었다”고 말한다. 그러다가 옥동에게 처음으로 선아를 소개해준 날, “내일 아침에 된장찌개 끓여놔요. 먹으러 올게. 어멍 건 맛있어. 다른 건 맛이 없어서 안 먹어”라 툭 내뱉는다. 아들의 이 한마디에 옥동은 지금껏 보여주지 않던 미소를 짓는다. 다음 날 새벽부터 깬 옥동은 부지런히 아들이 먹을 된장찌개를 끓인다. 그렇게 한 사발을 끓여 정성스레 밥상에 올려놓은 후 옥동은 다시 잠이 들었다. 다시 깨지 않을 단잠을. 영면(永眠)이다.

뒤늦게 옥동에게 온 동석은 이렇게 읊조린다. “사랑한단 말도 미안하단 말도 없이, 내 어머니 강옥동 씨가 내가 좋아했던 된장찌개 한 사발을 끓여놓고 처음 왔던 그곳으로 돌아가셨다. 죽은 어머니를 안고 울며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나는 평생 어머니, 이 사람을 미워했던 게 아니라 이렇게 안고 화해하고 싶었다는 걸. 난 내 어머니를 이렇게 오래 안고 지금처럼 실컷 울고 싶었다는 걸.”

동석과 옥동은 ‘언어의 연금술사’로 불리는 노희경 작가의 신작인 케이블채널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의 두 주인공이다. 프랑스의 작가 플로베르는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을 주장했다.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는 적합한 단어는 하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에 빗대자면 동석과 옥동을 연기한 배우 이병헌과 김혜자는, 두 인물을 연기했다기보다는 두 인물 안으로 들어갔다. 동석과 옥동이라는 각각의 배역을 소화할 수 있는 더없이 적합한 유일한 배우였다는 의미다.

안진용 기자 realyo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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