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종의 시론>나침반 없는 한국경제, 가을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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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종 산업부장

1060조 투자 보수적 회귀 조짐
세계 경기 악화와 빅스텝 부담
성장동력 발판 시작도 못 할 판

수출 악화하고 반도체도 흔들
저성장·고물가 환부 제어 시급
박빙 경제 조타할 능력 발휘를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SK그룹 회장)은 지난 13일 제45회 대한상의 제주포럼 간담회에서 SK그룹의 투자계획을 언급했다. 최 회장은 “이자가 계속 올라가는 만큼 전략·전술적인 형태로 투자를 지연하는 정도쯤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투자가 밀려서 지연되기는 하겠지만 (투자를) 안 할 계획은 없다”고 했다. SK그룹은 앞으로 5년간 반도체, 바이오 등 핵심 성장 동력 강화를 위해 2026년까지 247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부분적으로나마, 불가피하게 이를 수정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 것이다. ‘전술적 판단’이라는 단서를 붙였고 투자 철회는 아니라고 부연했지만, SK하이닉스가 충북 청주에 4조3000억 원을 투자해 증설키로 했던 신규 반도체 공장 건설 계획을 보류한 것으로 19일 파악됐다.

불과 2개월 전, 10대 주력 대기업을 포함한 재계는 1060조 원에 달하는 전례 없는, 대규모 투자계획을 제시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신(新)정부 출범과 친(親)기업,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로의 ‘복귀’ 선언 및 드라이브에 대한 화답 성격이 강했다. 과거 정부 때도 있었던 일이기는 하지만 규모가 남달랐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투자 규모를 대신 가늠해 주거나 교통정리를 했는데 이번 정부 들어서는 그 기능이 없어 눈치를 유독 심하게 봤고, 일부 기업은 부랴부랴 서너 시간 만에 수십 조 투자 규모를 뚝딱 만들기도 했다”는 뒷얘기도 전했다. 다만 초일류 기업들이 정부, 가계 등 경제주체 및 글로벌 시장과의 신뢰로 확인한 중대한 경영행위를 슬그머니 뒷전으로 밀지는 않을 것이란 데는 모두 믿음이 있다. 최 회장도 투자를 하지 않을 계획은 없다고 했다. 다른 기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제는 이런 긴축·보수적인 경영 행태로의 회귀 움직임이 비단 SK그룹이나 배터리, 전지소재 등 신성장 투자 소요 기업에 국한하지 않고 재계 전반의 투자 및 재무전략 수정과 변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미 설비 증설을 재검토하거나 원점에서 살피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설비 도입, 증설을 포함한 수십 조의 대규모 투자는 장기간의 안정적인 수요 확보와 영업이익 창출을 전제로 하는 게 불문가지다.

그런데 고환율·고물가·고금리 등 3고(高)와 글로벌 공급망 교란, 장기화하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주요 2개국(G2) 갈등과 패권 다툼 리스크 등으로 투자 환경은 개선될 기미가 없고 오히려 자금조달 부담만 커질 상황이 됐으니 시나리오를 점검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절차일 터다. 정보기술(IT)업계 관계자는 “모바일, 전자제품 수요 위축은 이미 현실화했고 반도체조차 하반기 경기가 극히 불투명하다”고 했다. 국내 주가는 최대 낙폭을 기록했고 고유가·강달러 여파로 올해 상반기 무역수지 적자는 1996년 이후 반기 기준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빚투·영끌을 한 이에 대한 채무구제가 도덕적 해이 논란을 불러일으키자 금융 당국은 “따뜻한 마음으로 이해를 부탁한다”고 했다.

별일 없어 보이는 듯싶지만, 이 정도면 경제 전반에 고루 환부(患部)가 썩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은 현기증이 든다. 경제사령탑인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2022 세제개편안 당정협의회’에서 “지금 우리나라 경제는 저성장이 굳어지는 상황에서 고물가 등으로 민생경제 어려움이 지속하는 복합 경제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했다. 추 부총리의 진단이 맞는다면, 과연 대응, 대책은 제대로 수립돼 진행되고 있는가. 8월 20일은 돼야 100일이 되는 윤석열 정부의 성공, 안착, 연착륙이나 일각에서 얘기하는 레임덕까지 논하고 싶지는 않다. 아직 성과를 평가하기는 너무 이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박빙의 경제 상황을 감당할 조타 능력이 불안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일부 경제계 인사들은 “솔직히 낙엽 지는 가을이 두렵다”고 한다. 25년 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도 해일이 덮치기 직전까지 유독 평화로웠다. 전대미문의 매머드급 복합위기에 정교하게 대응해 위험을 분산하기 위한, 화급을 다투는 공감대 형성과 정책 대응이 긴요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