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의 ‘안나’가 불타는 화로에 던진 것은

■ 영상 속 미술 - 4. 수지의 ‘안나’가 불타는 화로에 던진 것은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배우 수지는 드라마 ‘안나’에서 거짓으로 성공을 이룬 주인공 역을 실감나게 했다는 평을 들었다. 쿠팡플레이 스틸.

6부작 드라마 ‘안나’를 다시 봤습니다. 첫 번째 봤을 때의 울림이 더 커지더군요. 요즘은 각종 OTT와 유튜브 등을 통해 볼거리가 넘쳐나기 때문에 드라마를 두 번 보는 경우도 없는데 ‘안나’는 달랐습니다. 사소한 거짓말을 시작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의 이야기가 매혹적이어서 또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드라마 초반에 미술학원 강사가 안나에게 묻습니다. “너 꼭 미대 가야 하겠니?”(성인 영화 감독으로 유명한 봉만대 씨가 강사 역으로 나와서 눈길을 끕니다.)

당시 본명인 유미로 불렸던 소녀 안나는 이렇게 답합니다. “예술은 아름답잖아요. 난 아름다운 게 좋아요.” 꿈꾸는듯한 안나의 목소리를 들으면, 몽롱한 기분이 듭니다.

거짓의 성에서 쌓은 자신의 삶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안나가 이렇게 중얼거릴 때 가슴이 저릿하더군요. “이렇게 무너지려고 여기까지 왔나봐.”

북미의 어느 산골로 숨어 들어간 안나가 눈이 쌓여서 발이 푹푹 빠지는 길을 걷는 장면이 압권이더군요. 품에 한아름 장작을 안고 와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화로에 던져넣는 모습은 ‘가짜 인생을 불에 던져버린다’는 상징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거짓 인생을 진짜처럼 연기한 수지

주인공 안나 역을 한 배우 수지는 뛰어난 연기력을 보였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거짓말을 통해 성공을 얻은 후 불안에 시달리는 여성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연기해냈다는 평을 들었지요.

그동안 수지는 노래를 부르든, 연기를 하든 그 실력이 미모에 가려지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이번엔 달랐던 거지요. 16세 때 가수로, 17세 때 연기자로 데뷔한 이후 오랫동안 쌓아온 공력의 결실일 것입니다.

연예기획사의 연습생 시절에 그가 쓴 노트를 보면 이런 말이 적혀 있더군요. ‘쓰러져서 병원 갈 정도로 연습하기. 내가 쉬고 있으면 그들은 무언가 배우며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담금질 했던 수지는 이제 30대를 앞둔 연기자로 이런 소망을 비쳤습니다. “진짜처럼 보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늘 갖고 있고, 그렇게 보이도록 연기하고 있다. 진정성 있는 배우라는 수식어를 얻었으면 좋겠다.”

거짓의 삶을 산 안나를 실감나게 연기한 것이 진짜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덕분이라는 것. 아이러니한 진실이지요.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안나 사진 극 중 안나는 미국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며 학력 위조를 한 후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희대의 사기 스캔들을 떠올리게 한 안나

극 중 안나는 미국 명문대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것으로 나옵니다. 조선 문인화를 전공했다며 한 대학의 평생교육원에서 교양 수업을 강의합니다. 나중엔 학부생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정식 교수가 되지요.

이는 가짜 학력에 의한 것입니다. 또한 사업가로 성공한 후 정치에 입신한 남편의 힘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런 안나의 모습은 한 실존 인물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유명 큐레이터 출신으로 대학교수를 지내다가 학력 위조와 횡령 혐의로 수감되기까지 했던 바로 그 여성입니다. 미술계와 대학가, 정치계 뿐 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큰 파문을 일으켰지요.

당시 거대한 사기극을 벌인 여성의 실체와 관련한 많은 이야기들이 나돌았지요. 단순한 가십으로 소비되기도 했지만, 인간의 성공 욕망이 왜곡됐을 때 어떤 비극을 초래하는 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운위됐지요. 학력 차별 사회의 실상이 드러났다는 성찰도 있었고요.

그 여성은 법 체계가 요구하는 형벌을 치른 후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 행복한 나날을 꾸려가기를 바랍니다.

다만 우리 사회는 그 사건으로 얻은 교훈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녀가 어느 미술관 큐레이터를 했을 때, 내부에서 학력을 위조한 사실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미술관의 명성에 흠이 갈까봐 쉬쉬했다니, 결과적으로 그것이 거짓 삶을 이어가며 이력을 부풀리는 발판이 된 것이지요.

언론계, 학계, 불교계, 정계의 유력 인사들이 그녀의 뒷배를 봐 줬습니다. 거짓 행각을 몰랐다기 보다는 눈을 감았다는 정황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이 원래 그런 곳이라고 여기기에는 그들의 악영향이 너무 컸습니다.

그녀의 사기 행각 출발지였던 미술계는 예술 작품을 다루는 곳입니다. 단 1%의 가짜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불변의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엄청난 사기극의 모태가 되었으니 부끄러운 일입니다.

미술계 취재를 하다 보면, “거장들의 작품이 시장에 계속 쏟아지는데, 과연 다 진짜일까”라는 이야기를 흔히 듣습니다. 이런 현실이 나아지려면 미술계 종사자들이 ‘돈’에 앞서 ‘예술’을 다룬다는 자부심으로 엄정함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미술 소비자들은 안목을 갖추기 위해 작품을 다양하게 살피며 부지런히 공부해야 하고요.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흥선 추사 김정희가 그 솜씨를 인정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묵란도. 문화재청 홈페이지.

▲안나가 언급한 추사 작품의 진위

극 중 안나가 강의를 하다가 추사 김정희(1786~1856)를 언급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추사는 안목이 높아서 마음에 안 드는 작품에 대한 혹평을 참지 못했습니다. 망작(妄作)이라는 표현을 쓰고 흙냄새가 난다고까지 했지요.”

옛 기록을 보면, 추사는 실제 그랬습니다. “서화를 감상하는 데는 금강안(金剛眼) 혹리수(酷吏手) 같아야 그 진가를 가려낼 수 있다”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지요. 사찰을 수호하는 금강 역사의 눈처럼 무섭게, 그리고 세금을 거두는 혹독한 세무관리의 손끝처럼 치밀하게 봐야 서화의 진가를 판단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추사가 극찬한 작품이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난초 그림입니다. 추사는 34세 연하의 이하응에게 편지를 써서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작품이 없다”고 했습니다. 당대의 문인화가들이 난초를 많이 그리지만 하나같이 망작에 지나지 않으나, 이하응의 난초 그림만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조카이자 제자인 이하응의 작품을 칭찬하기 위해 당대의 화가들을 모두 낮춘 셈이니, 그의 금강안 혹리수에 웃음이 납니다.

추사는 조선 최고 명필 중 한 사람인 원교 이광사(1705~1777)의 글씨에 대해 이렇게 평합니다. 전남 해남 대흥사의 초의선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입니다. “원교의 대웅전 편액을 다행히 본 적이 있다. 천박한 후배들이 비평할 바는 아니나 만약 원교의 자처한 바로 논하면 너무도 전해들은 것과 같지 않다. 그가 조맹부체의 덫 안에 추락해 있다는 말을 면치 못하겠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추사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나, 진품이 아니라는 주장이 일부 학자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글씨. "산은 드높고 바다는 깊으니, 하늘에서 즐기고 바다에서 노닌다"는 뜻으로, 하늘에서 즐기고 바다에서 노닌다는 뜻의‘遊天戱海’와 짝을 이룬다. ⓒ 삼성미술관

▲유홍준과 강우방의 추사 작품 진위 논란

국내 대표적 미술사학자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추사의 감식안에 대한 일화를 전합니다. 제주도에 유배를 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렀다가 이광사가 쓴 대흥사 현판 글씨를 비판했으나 나중에 인정했다는 사연입니다. <전주, 남원을 거쳐 완도로 가던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났다. 기개가 살아 있어, 대흥사 현판 글씨들을 비판했다.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 이광사인데 어떻게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는가.” 추사는 있는 대로 호통을 치며 신경질을 부렸다. 초의는 그 극성에 못 이겨 원교 현판을 떼어내고 추사의 글씨를 달았다고 한다. 1848년 12월 63세 노령으로 귀양지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초의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옛날 내가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이 지금 어디 있나? 다시 달아주게.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어.”>

그런데 일부 역사 연구자들은 이 일화가 기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해오는 이야기, 즉 전설이라고 주장합니다. 한 연구자가 이를 지적하자, 유 전 청장은 “모든 사람이 전설을 인정하게 되면 전설이 사실이 되는 거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알다시피, 유 전 청장은 지난 2002년 ‘완당 평전’을 써서 김정희의 생애를 다뤘습니다. 그런데 일군의 학자들이 그 내용에 오류가 많다는 지적을 했고, 그런 이유로 책은 절판됩니다. 유 전 청장은 2018년 ‘추사 김정희’를 새로 출간했습니다. 새로 나온 자료를 반영해서 추사의 생애를 대중들에게 쉽게 전하겠다는 의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추사의 작품들이 위작 투성이라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원로 미술사학자인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 원장에 의해서입니다. 강 선생은 표지에 쓴 글씨 ‘山崇海深(‘산은 드높고 바다는 깊다’라는 뜻)’부터 위작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관련, 미술사 연구가인 황정수 씨는 “김정희의 서화에 대해 학술적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아 이처럼 진위논란이 벌어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책 ‘추사 김정희’의 표지에 쓰인 글씨는 모작이 분명하다며, 진품과 다른 필획 등의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그래도 진짜 세상을 향해 앞으로 가야

이처럼 추사 작품에 대한 진위 논란이 벌어지는 것은 황 씨의 말대로 후학들의 연구가 부족해서입니다. 추사가 워낙 여러 분야에서 방대한 성취를 한 예술가이며 대학자인데다가 후대인들의 모작, 위작이 성행했던 탓에 체계적 연구가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진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에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은, 학자와 연구자는 엄정한 자세를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명해서 영향력이 클수록 더 그래야 합니다.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전설’을 ‘사실’로 둔갑시키는 태도를 벗어나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고미술품을 바라보는 일반의 안목이 높아져야 할 것입니다. 안목은 끊임없이 훈련해야 얻어진다고 합니다. 박물관, 미술관을 자주 다니며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관계자들과 계속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 분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문화 선진국이 가까워오겠지요.

드라마 ‘안나’에서처럼 세상에서 가짜를 다 불태워버리는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모듬살이는 그런 희망을 놓지 말고, 진짜가 빛이 나는 세상을 향해 천천히 전진해나갔으면 합니다.

장재선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