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수은 인턴기자
■ 독자들이 만드는 베스트셀러
‘세이노의 가르침’ 예판 흥행
하기싫은 일해야 몸값 뛴다 등
1000억 자산가 인생조언 모음
인터넷 유통되다 책으로 출간
“세계관 궁금” 게이머들 요청에
문학고전 ‘롤랑의 노래’ 출간
독자 모금 ‘북펀딩 시장’ 성장
웹소설 ‘화산귀환’ 12억 후원
독자들이 출판 시장을 움직이고 있다. 출간 전부터 서점가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화제를 낳고 있는 자기계발서 ‘세이노의 가르침’(데이원)은 2000년대 초반 이후 저자가 여러 매체와 블로그에 쓴 글에 열광한 독자들이 제본서를 제작해 돌려 읽던 ‘재야의 명저’다.
50곳이 넘는 출판사와의 경쟁에서 계약을 따낸 데이원은 다음 달 초 책을 정식 출간한다. 예약 판매 중임에도 책은 알라딘과 예스24에서 각각 종합 베스트셀러 4주, 2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 데이원 측은 판매 부수를 공개하지 않고 있으나 출판계에선 최소 10만 부 이상은 팔렸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독자들의 자발적 팬덤이 대형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낸 셈이다.
이와 함께 독자들이 제작비를 후원해 책을 출간하는 북펀딩 시장 역시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고, 독자들의 요청에 절판된 책을 복간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장은수 출판평론가는 “독자들이 ‘수동적 소비자’를 넘어 생산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적극적 주체’로 부상하고 있다”며 “SNS 시대에는 팬덤의 움직임을 간파하는 출판사가 시장에서 승기를 잡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인터넷 유통 ‘재야의 명저’, 입소문 타고 정식 출간
‘세이노의 가르침’을 쓴 저자는 ‘세이노(Say No)’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1000억 원대 자산가다. 1955년생으로 무일푼에서 시작해 부동산 사업과 증권 투자 등을 통해 자산을 쌓았다.
2000년 무렵부터 언론과 블로그에 글을 써온 그는 단순한 재테크 비법뿐 아니라 성공을 위한 삶의 자세부터 좋은 의사·변호사 만나는 법, 훌륭한 일자리를 얻기 위한 전공의 역할 같은 실용적 조언을 건넨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글로 소통하는 세이노의 필명은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가치에 대해 ‘노(No)’라고 말할 용기를 지녀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좋아하는 일이라고 섣불리 하지 마라’ ‘하기 싫은 일을 해야 몸값이 오른다’ 같은 가르침은 단숨에 수많은 팬을 만들어냈다.
팬들은 ‘세이노의 가르침’이라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꾸려 세이노의 글귀를 모은 PDF 파일을 공유하고 제본서도 제작했다. 제본서는 세이노가 ‘출력센터’라는 제본 회사에 저작권 사용을 허가한 이후 인터넷에서 6600원에 유통됐다. 제본서는 입소문을 타며 팔려나갔고 유튜버들은 이 콘텐츠를 소개하면서 책 출간을 위해 세이노와 접촉한 출판사가 무려 50여 곳에 이르렀다.
세이노는 지난달 인터넷 커뮤니티 ‘세이노의 가르침’에 올린 출간 과정에 대한 글에서 “(나를 과장해 추켜세우는) 미사여구 없이 담백하게 ‘현재 인터넷에서 판매되는 제본 가격 수준으로 출판하고 싶다’는 뜻을 전한 데이원을 골랐다”고 설명했다. 다음 달 서점에 배포되는 책의 정가는 700쪽이 넘는 분량임에도 불과 7200원. 인터넷 서점에서 10% 할인을 받으면 제본서보다 저렴한 6480원에 구매할 수 있는 셈이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세이노의 가르침’ 제본서를 소개한 유튜브 채널 ‘김유라 TV’.
◇게임 마니아들이 고전 발굴
지난해 출간된 ‘롤랑의 노래’(휴머니스트) 역시 독자들의 팬덤이 책 출간으로 이어진 사례다.
작자 미상의 기사(騎士)문학 고전인 이 책의 출간 배경은 20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출판사 휴머니스트는 수메르의 영웅 신화를 담은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개정판을 출간했는데, ‘페이트 그랜드 오더’라는 게임에 빠진 유저들이 이 책을 줄지어 구매하면서 1만 부 넘게 팔렸다.
게임 속 영웅 길가메쉬가 실제 신화에서 어떤 인물이었는지 ‘학습’한 유저들은 출판사에 트위터와 이메일 등으로 게임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있는 고전을 추가로 출간해 달라고 요청했다.
휴머니스트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롤랑의 노래’를 선보였다. 이어 출간한 수메르 신화 속 여신에 관한 ‘최초의 여신 인안나’ 역시 게임 유저들의 요구로 나온 책이다.
◇북펀딩 후원자 5년 새 3배 ‘껑충’
독자들의 모금으로 책을 만드는 북펀딩 시장도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실제로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텀블벅의 출판 부문은 5년 새 후원자 수와 후원 금액이 각각 3배, 3.6배 이상 성장했다.
네이버 무협 웹소설 ‘화산귀환’의 경우 지난해 2만3000명의 후원자가 12억 원을 모금해 최다 후원금 기록을 갈아치우기도 했다.
안재욱 텀블벅 매니저는 “가성비만을 따지지 않고 참신하고 뜻깊은 프로젝트에 기꺼이 지갑을 열 뿐 아니라 주변에도 열성적으로 홍보하는 게 북펀딩 후원자들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제작비 모금’과 ‘홍보 효과 제고’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이점 덕분에 최근에는 자금 조달이 여의치 않은 1인 출판사뿐 아니라 중견·대형 출판사도 텀블벅 시장에 몰리는 상황이다. 실제로 메디치미디어는 예스24의 북펀딩 플랫폼 ‘그래제본소’를 통해 일본 아동문학 연구자 이케다 마사요시의 ‘세계명작 동화를 둘러싼 40년의 여행’을 출간했으며, 휴머니스트 역시 ‘여성과 공포’를 주제로 한 세계문학 시리즈 시즌1 출간에 앞서 텀블벅에서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해 목표금액을 678% 초과 달성했다.
◇절판 시집도 독자 요청에 재출간
절판돼 헌책방에서 수십만 원 안팎에 거래되던 책이 독자들 요청으로 재출간된 사례도 주목받고 있다.
문학동네는 2020년 하반기부터 유명 시인의 ‘절판된 첫 시집’을 새로 펴내는 ‘포에지’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현재까지 총 60권이 출간됐는데 이 가운데 9권이 중쇄 이상을 찍었다.
시리즈를 기획한 문학동네 계열사 난다의 김동휘 편집자는 “소설 쏠림이 두드러지는 문학 시장을 고려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라며 “최승자의 ‘연인들’, 박상수의 ‘후르츠 캔디 버스’, 김민정의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등이 특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문학동네는 이번 주 최문자의 ‘귀 안에 슬픈 말 있네’, 장옥관의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등 10권을 추가로 출간한 데 이어 올해 안에 30권을 더 내놓을 계획이다.
■ 독립출판물로 나왔다가 폭발적 호응 … 대형출판사 재출간 사례도
김예지 ‘저 청소일 하는데요?’
백세희 ‘죽고 싶지만 떡볶이…’
자비출판·펀딩 후 정식 계약
예상을 뛰어넘는 인기에 독립출판물로 나왔다 대형 출판사의 신간으로 다시 제작되거나 전자책을 종이책 버전으로 확대한 사례 역시 출판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독자들의 힘을 보여준다.
빌딩 청소 일을 하며 생계를 꾸린 이야기를 에세이로 풀어낸 김예지 작가의 ‘저 청소일 하는데요?’(21세기북스)는 저자가 자비를 들인 독립출판물로 먼저 독자와 만났다. 김 작가는 2018년 100부를 제작해 몇몇 동네 서점에 공급했는데, 추가 주문이 잇따르며 수개월 만에 5000부 이상 팔았다. 청소에 대한 주변의 편견 가득한 시선을 견디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이어간 스토리가 젊은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책의 대중성과 시장성이 충분하다고 판단한 출판사 21세기북스는 김 작가에게 연락해 같은 제목의 책을 내놓았다. 이 책은 2만6000명의 선택을 받았다.
백세희 작가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흔) 역시 ‘독립출판물의 전설’로 회자되는 작품이다. 편집자 출신인 백 작가가 우울증을 극복한 과정을 담은 책은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텀블벅에서 화제를 모은 뒤 출판사 흔과 정식 계약을 맺었다. 출간과 동시에 대형 온라인 서점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5만 부가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전자책으로 먼저 입소문을 탄 뒤 종이책 출간을 통해 대박을 낸 대표 사례는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클레이하우스)와 ‘불편한 편의점’(나무옆의자)이다. 밀리의서재가 지난해 초 선보인 전자책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는 12만여 명이 서재에 담을 만큼 인기를 끌었다. 독자들의 호응은 종이책으로도 이어져 18만 부 이상 팔렸으며 최근엔 ‘해리포터’ 시리즈를 출간한 영국 대형 출판사 블룸즈버리가 영어 판권을 구매하기도 했다. 김호연 작가의 ‘불편한 편의점’ 역시 전자책 플랫폼에서 쌓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2020년대 이후 ‘달러구트 꿈 백화점’ ‘아몬드’에 이어 한국 소설로는 세 번째로 100만 부 판매를 돌파하며 교보문고 연간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했다.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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