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의 미운정 고운정… 또 30년이 흘러야 잊을까[그립습니다]

  • 문화일보
  • 입력 2023-04-20 08:58
  • 업데이트 2023-04-20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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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립습니다 - 배경분 전 영남삼육중·고 교사(1955∼2011)

아내 11주기 기일(忌日)이라 아이들이 서울에서 왔다. 생전에 아내는 장애우를 위해 봉사하겠노라며 사범대를 졸업했지만, 다시 늦은 나이에 사회복지과 대학원을 마치고 이를 준비 중에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자신이 하반신을 걷을 수 없는 휠체어로 생활하다가 척수암으로 5년 투병 끝에 생을 마감했다.

1주기 추도예배를 꽤 격식을 갖추어 드렸고, 작은 음악회로 고인을 추모했다. 2주기부터는 가족과 형제만으로 추도예배를 드렸다. 흐르는 세월처럼 가족을 잃은 아픔과 슬픔과 고독이 희석되어 가기를 바랄 뿐이다. 30년의 미운 정 고운 정이 배어 있으니 또 30년이라는 시간의 강물이 흘러야 죄다 떠 내려보낼 수 있을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는데 왠지 가족과의 이별은 쉽게 망각하지 못하나 보다. 내 마음 한쪽에 있는 아내의 자리가 또 다른 무엇으로 채워지기 전까지는 망각의 바다로 흘려보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아이들이 즐겨 찾는 ‘길성이 백숙’에서 식사를 했다. 아내 산소에도 다녀왔다. 멀리 대구에서 형과 여동생, 매제도 왔다. 혼자 있는 집에 지난 일요일은 모처럼 떠들썩한 잔칫집 분위기였다. 대구 여동생이 내가 먹을 반찬거리를 이것저것 너무 많이 준비했다. 혼자 사는 오빠를 위해 항상 애틋한 마음에 안타까워하고 있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음식을 준비한 동생의 손길을 생각할 때 입으로 먹는 음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먹게 될 것 같다. 한동안 반찬 부자가 됐다.

그날 먹을 음식을 정성껏 준비해서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형제가 오랜만에 모여 동거함이 어찌 이다지도 아름다운고…. 형제의 따스한 정을 실감하는 시간이다. 이제 9형제 모두가 60이 넘었거나 80을 코앞에 맞이하고 있다. 이제 살 날이 산 날보다 훨씬 적다. 지금부터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보람있게 보내느냐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또 가족이 모여서 죽은 자와 산 자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죽음을 알면 알수록 삶이 더 진지하게 헛되어 살지 않을 것 같다. 일반 사람들은 항상 죽음을 그저 스쳐 가는 것으로 보기에 삶의 소중함과 신비를 알지 못하고 산다. 아내의 죽음 이후로 예전에 알지 못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예전과 달리 들리지 않은 소리를 듣게 되고, 예전에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것도 새삼스레 생각하여 가고 있다.

망자는 어떤 한 마디도 가르쳐주고 말해 주지 못하고 있지만, 산자는 매일 매일 망자를 통해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배우고 있다. 20세기 최고의 역사학자인 아널드 토인비의 말 그대로 아내를 떠나 보내고 매일 배우고 있다. “한 사람 때문에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한 사람 때문에 하늘 위로 붕붕 날기도 하고, 한 사람 때문에 천 길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지기도 한다. 가장 가까이 있는 한 사람이 한결같은 믿음과 사랑으로 응원하면, 그 상대편의 다른 한 사람은 바보라도 영웅이 된다.” 그래서 망자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나 보다. 오늘 내가 아내로부터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엄마의 만류를 무릅쓰고 15세 연상의 남자와 결혼한 신달자 시인이 뇌졸중의 남편을 24년이나 돌보다 2000년에 세상을 떠나 보낸 후의 시구가 나의 사모곡이다.

아침에 창을 열었다 / ‘여보! 비가 와요’/ 무심히 빗줄기를 보며 던지던 / 가벼운 말들이 그립다 /‘국이 싱거워요?’/ ‘밥 더 줘요?’/ 뭐 그런 이야기 / 시시하고 말도 아닌 그 말들에게 / 나보다 먼저 아침밥 한 숟가락 / 떠먹이고 싶다

아내 기일에서 나도 언젠가 내 곁을 훌쩍 떠난 아내처럼 홀연히 나의 것으로 될 나의 죽음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때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오늘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가 죽을 때의 바로 나의 모습이 될 것이 틀림없다.

청주에서 삼육대 재단 정종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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